글은 결국 자전적 이야기이자, 내가 만난 세상에 대한 '보고'였어
오늘이,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어도 괜찮겠다는.
그런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간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까지, 나는 ‘왜 나는 그간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대체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인생을 낭비하면서 이 나이까지 밀려오게 되었나 하는 생각의 굴레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나의 다양한 경험과, 그런 경험을 통해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준 특별하고 소중한 메시지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키워줬구나. 성장하도록 지지대가 되어주고, 햇빛이 바람이 수분이 영양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밭에 심겨 우리는 모두 같은 식물이고, 같은 열매를 같은 시기에 맺는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 생각을 의심하지 않으며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같은 종의 같은 과의 식물이라도, 그 식물마다 가지나 줄기의 키나 길이가 제각각 다르고, 잎사귀의 모양도, 색깔도, 열매를 맺기 전 피우는 꽃의 크기도 색깔도 다르고, 열매의 크기도 다를 수 있다는 걸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물며 같은 종류의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들끼리도 이렇게 제 각각인데, 같은 밭에 심어졌다고 같은 식물이었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시간 속에서 나의 이파리가 돋는 위치와 내가 꽃피는 시기가 그들과 다른 일 같은 걸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모른 채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불안과 우울, 좌절감과 패배감을 느꼈던가 싶다.
내가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했을 때 나의 하루하루는 마치 커다란 집채 만한 망치와 도끼가 내 위로 끊임없이 탕-탕 하는 소리를 내며 낙하하는 지옥에서 그것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 순간 내 피를 졸여갔고, 덕분에 더욱 끈적거리던 피는 순환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드리즐 같이 끈적이던 내 혈액은 이제 서야 제 묽기로 돌아와 다시 잘 돌아가는 듯 보인다. 다행히도.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내 인생은 완벽하지 않았고, 상당히 실수투성이였고, 생각보다 우연의 연속으로 이어져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만신창이었다고 믿었던 시기조차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며, ‘행복한’ 은 ‘시절’이 아닌 ‘순간’라는 단어와 만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글은 ‘자전적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은 가졌을 때가 있다. 모든 글은 ‘자전적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은 가졌을 때가 있다. 전적으로 맞는 이야기긴 하다. 하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자전적 이야기이자, 자기가 만나 본 ‘세상에 대한 보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뇌에서 만들어진 생각을 기반으로 손가락이라는 신체 부위로 열심히 밤낮이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 데다 내려가다 가끔 씩 다시 글을 읽어보는 것은 내 눈이며 그것을 이해하면서 읽는 것 또한 내 뇌이지만. 어느 순간 내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마치 내 안의 누군가가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내 신체는 그 내 안의 누군가가 조종하는 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었다.
글이 써지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게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라는 생각과 손끝이 동시에 움직이는 그런 특별한 경험을 할 때 글을 쓰는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에 중독되어 매일같이 글을 쓰는 것을 하지 않으면 쾌감을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매료되었고, 결국 지난 10주가 넘는 시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아주 조금이라도 글을 썼다.
드디어 오늘 원고가 내가 초기에 에디터 J와 계획했던 150장이라는 초고 원고 분량을 넘겼고 (물론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서 적어도 180장은 되어야 마무리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외려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니 할 이야기가 점점 더 많아져서 글을 어느 지점에서 일단락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맺음을 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만은, 언제나처럼, 이번 상반기는 정말 많이 힘들었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내가 흘린 눈물은 아마 인생의 기나긴 시기 중 가장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려보낸 시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그 시기를 거치며, 넘어져서 까진 무릎 위에 누군가 소금을 뿌리기도 했지만,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주려고 뻗는 수많은 손들을 만났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너무 낡고 닳고 닳은, 그런 표현이지만,
사람으로 받은 상처를 사람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클래식한 미담은 여전히 유효했다.
적어도 나에게.
출판 프로젝트의 초기 목표로 정했던 6월 말까지 원고를 탈고하고 최소 150장을 작성할 것을 (원고량이 많아져서 탈고 시기가 1-2주 늦어지겠지만) 달성했다. 성취감이라는 표현은 그리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는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원고를 담다 하게 써 내려가면서 빛바래고 쿰쿰한 냄새나는 내 삶이라는 책장 곳곳에 끼워두고 한참을 잊어버린 마른 단풍을 만난 듯 아름다운 시절을, 소중한 추억을 되뇌면서 스스로 많은 치유를 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감사한 인생이구나. 정말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여기까지 왔구나. 혼자 걸었다고 혼자 외롭게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면서 아무도 없다며 암흑이라고 생각했던 내 주변을 보지 못한 건 그들이 거기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의 존재를 눈으로만 확인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손을 뻗었을 때, 그들은 늘 거기 있었다. 다만 내 시력이 좋아지지 않았을 뿐.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이런 소중한 삶을 함께 만들어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