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나만의 음악적 게토 ghetto를 찾아서, 정지선 디렉터
[아치쿠가 만난 아트&피플]은 미술 작가, 배우, 영화감독, 음악감독, 프로그램 개발자, 스타트업 CEO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보는 아치쿠의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아트디렉터 아치쿠가 만난 아트&피플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또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와 각자의 시선에서 본 '미술'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며 각자의 삶에서 '미술'이 혹은 '예술'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art director, ARTSYKOO
아직 PART I을 읽지 않으셨다구요? :)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 정지선 디렉터의 음악감독 생활 이야기로 가득 찬 고군분투의 20대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art director ARTSYKOO
Part II
ARTSYKOO. 방송계에서 겪었던 성취와 동시에 놓친 것들에 대한 혼란의 시기를 보낼 때 정지선 디렉터 앞에 나타났던 남편분은 인생의 구원투수와도 같은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많은 치유를 받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그전에 몰랐던 행복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쌓아가기 시작하였죠. 그런데 돌연 불혹의 나이에 다시 꿈을 가지고 가정과 일이 양립하는, 엄마이자 아내인 정지선과 게토 얼라이브의 디렉터로서의 삶을 선택하셨어요, 그런 엄청난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저를 믿고 사랑해주는 남편, 예쁘고 건강하게 잘 커준 우리 삼 형제,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심지어 행복함을 느끼는 하루하루를 사는데도 뭔가 삶이 반쪽짜리처럼 공허함이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뭔지 모를 답답한 먹먹함이 밀려와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제 속에는 뭔가 정확히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의지의 불구덩이가 활활 타오르는 그런 마음이 들었더랬죠. 그냥 막연히 "지금 이 삶은 내 삶의 전부가 아니다. 나는 반드시 뭔가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데. 꼭 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정말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길어지기 시작했어요.
게토를 처음 구상하고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반응은 응원보다는 사실 우려가 더 컸지요. 하고자 하는 일, 꿈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 했을 때 사실 처음부터 ‘그래 잘 될거야, 한번 해봐!’라고 시원하게 격려해주는 사람이 없었죠. 처음엔 다들 말렸어요. 가족들, 친구들까지 모두 다.
아이들이 한창 손이 많이 가는 때인데 아이들 건사는 어떻게 할 거냐, 이제 와서 그걸 해서 무슨 의미이냐 하는 주변의 반문들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했어요.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건가?', '나 하나 꿈을 이루고자 가정을 뒷전으로 하는 건 나쁜 선택인 걸까?' 하는 의심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사실 그것이 정신적으로 저를 가장 불안하고 주눅 들게 만들었죠.
심장이 쪼그라드는 압박으로 시작하던 그 수많은 아침과,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 그리고 이곳의 정체성에 대한 계속되는 질문들을 경험하면서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나가고 멀리 내다보기로 하고는 작은 어려움에 의연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절박했어요. 반드시 제가 상상한 꿈을 현실에서 이뤄내고 싶었고, 그만큼 또 갈 길이 멀다는 걸 알았기에 어떻게 되었든 제가 하는 행위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찾아야만 했죠. 게토가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잡아가기 전까지 오픈 후 약 3년 동안 제가 게토에 출근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공간이에요?”하는 게토 주변, 혹은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질문이었어요.
절박했던 저였기에, 그리고 가정이 있는 저였기에 제게 주어진 시간을 한시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버티고 또 버텼고, 무엇인가 잘 모르면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혼자 책을 읽으면서 저에게 모자란 부분은 채워가면서 그렇게 게토의 디렉터로 게토를 심고 가꾸면서 게토에서 싹이 트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그렇게 오기로, 버티기로 4년을 하니, 새로 생기고 또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이 성수동이라는 곳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버틴, 그리고 앞으로 더 큰 음악적 게토로 성장할 터전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ARTSYKOO. 그렇게 버틴 4년, 초기의 게토 얼라이브와 지금의 게토 얼라이브를 비교할 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그리고 현재 게토 얼라이브의 공연은 어느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나요?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영향력있는 뮤지션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문화재단, 기관에서 먼저 게토로 연락이 와서 게토 얼라이브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씀을 해주시는 경우가 최근 여러번 있었어요. 이렇게 게토 얼라이브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기관과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서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요즘이에요. 5명도 채 되지 않는 극소수의 관객이 왔던 그날로 부터 오늘이 있기까지, 게토 얼라이브에서 버티고 또 버텨오길 정말 다행이고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게토 얼라이브'의 화두는 '스펙트럼의 확장' 그리고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19년, 개관 4년 만에 드디어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 예술 공간으로 선정되면서 게토의 운영과 게토를 찾는 뮤지션, 아티스트들의 스펙트럼 또한 자연스럽게 확장되기 시작했어요.
(사실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사업에 선정된 많은 예술공간 대부분은 '미술' 분야에 최적화되어 있는 전시공간 혹은 대안공간이고, 게토 얼라이브가 유일한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이었죠. 이 부분에서 저는 정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나름대로 지금까지 음악계에서 활동해 오면서 저만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실현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선정된 공간 대표분들 또한 너무 쟁쟁한 분들이셔서 저에게도 큰 자극이 되어 게토 얼라이브를 더 잘 꾸려가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죠.)
굵직한 지원사업이 확정되면서 게토 얼라이브 공연의 프로그램의 다양성도 확보되면서 게토를 방문하는 관객층 또한 다양하고 풍성해졌어요. 또한 점차 음악에만 국한된 사람들이 아닌, AI, Mapping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들이 오기 시작했고, 여러 실험 프로젝트를 하는 세계적인 인재들이 와서 프로젝트를 구현하는 그런 예술실험실과도 같은 공간으로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기 시작했죠.
제가 한 일은 이 '게토 얼라이브'라는 공간을 예술가들에게 자유롭게 이용하라고 문을 열어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재능있는 예술가들, 그들이 이 게토 얼라이브로 찾아와 이 공간만의 아이덴티티를 발견하고 또 지속적으로 새로운 공간의 가치를 발견해가면서 비로소 게토 얼라이브는 살아 숨쉬기 시작했어요. 진정한 의미의 게토 '얼라이브alive'가 되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게토는 자신의 공간적 아이덴티티를 세우고 더욱 열린 마음으로 젊고 실험적인 창작 작업이 부화할 수 있는 둥지가 되어 주면서 스스로 생명력을 더해가서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제가 가정주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집안일을 하면서 늘 머릿속에 제가 만들어갈 게토 공간에서 울려 퍼질 음악, 공연 신을 상상해왔어요. '이런 장르를 소개하면 좋겠다, 이런 음악이 흘러나오는 공간이면 좋겠다' 정말 막연히 상상만 했더랬죠. 그런데 제가 게토 얼라이브를 꾸려나가면서 점차 제가 꿈꾸던 그런 음악적 순간들이, 공연 기획들이 현실화되는 것을 하루하루 경험하면서 뭔가 “사는 것 참 희한하네. 어떻게 내가 꿈만 꾸던 일이 이렇게 차근차근 이뤄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시작했었어요. 그리고는 생각했죠. 제가 구상하는 디렉션을, 이상을 더 열심히 그려가기로, 그래서 결국 제가 그걸 현실로 맞이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그렇게 믿기 시작하면서 게토 얼라이브의 디렉터로써 제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심이나 의문 없이 제 꿈을 더 열심히 그려가기로 했죠.
제가 그간 수많은 음악과 뮤지션들을 접하면서, “아, 정말 저런 뮤지션은 우리 게토에서 공연을 하면 정말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분들이 이제 먼저 컨텍이 와요. 게토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그럴 때 정말 그간의 고생은 다 잊어버리고 짜릿한 희열과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보람, 인생의 묘미를 느끼게 되었어요. 제가 그리는 방향, 아이덴티티가 향하는 곳이 제가 사랑하는 뮤지션들, 아티스트들과 결을 함께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실은 정말 그 무엇보다도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왕년에 음악계에서 잘 나가던, 지금은 경력 단절녀가 되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노라며 소꿉장난 정도로 한가하게,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모습 정도의 공간을 꿈꾸었다면? 글쎄요, 게토 얼라이브가 가는 길은 더 쉬었을지언정, 제 기준에 ‘살아있는’ 음악, ‘자유로운 음악’을 노래하고, 또 그것을 알아봐 주고 찾아오셔서 게토 얼라이브를 완성해주시는 관객 여러분들과의 만남은 전혀 상상도 못 한 현실이 되고 말았을 거라 생각해요.
ARTSYKOO. 맨 처음 게토 얼라이브에 들어섰을 때, 육중한 문 (마치 연습실의 방음 철문과도 같은 육중한 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갔어야 했었죠)을 열고 들어섰을 때, 지하 공간이라는 다소 음침하고 어두울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은 마치 컬러로 갓 샤워를 하고 나온 듯 공간 전체에 펼쳐진 컬러 페인트의 순간성, ‘생생함’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마치 그건 공간 자체가 예술적으로 어떠한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들게 해 줬죠. 게토 얼라이브 공간이 주는 예술적 분위기, 특별한 그만의 아우라는 과연 어떻게 완성된 걸까요?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맨 처음 게토 얼라이브를 오픈했을 때의 공간 분위기는 지금의 자유분방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죠. 외려 클래식하게 정돈된 갤러리/ 공연장과 같은, 그런 정제된 공간으로 연출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20년이나 방치되었던 공간이었던 터라 천장에서 물이 새거나 시멘트가 떨어지는 등 내부 시설의 허약함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죠. 그렇게 자꾸 계속 제 나름대로 그 공간의 ‘문제’를 시공 혹은 화이트 컬러의 시멘트 등으로 보완하거나 혹은 덮어버려서 실제 공간의 모습보다 더 깨끗하고 산뜻한 공간으로 만드려고 부단히 노력했지요.
문제는 공간에서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뭔가 공간에서 영감이 떠오르거나 몰입감이 떨어지는, 공간 자체가 갖는 특유의 분위기/아우라와 공간의 연출 형태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공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아우라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중대한 계기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색의 난장’을 통해서였죠.
정확히 말해서 공간에 구상 이미지를 그리는 벽화가 아닌, 마치 1950년대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기법과 같이 드리핑 dripping 기법을 사용하여 물감 난장을 하는 아티스트를 섭외해서 페인트 즉흥 퍼포먼스를 진행했어요. 제가 그간 노력한 순백(혹은 그렇게 만들고자 했던 )의 공간은 한순간에 ‘난장’이 되어버렸고 그 ‘난장’의 페인트들이 게토의 공간에 적셔지면서 비로소 게토는 자신이 입어야 할, 게토 공간 자신이 가진 아이덴티티 반영한 옷을 제대로 찾아 입게 되었죠.
이 과정은 처음부터 저에게 ‘이렇게 하면 되겠다!’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 전혀 아니에요. 외려 ‘이제 공간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쳐져 버렸다’라는 근심 걱정에 잠 못 이룰 정도로 정제된, 클래식한 공간의 사수에 대한 제 의지는 강력했어요. 하지만 이미 공간 곳곳에 페인트가 갈겨져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 외려 이 상태는 ‘회복 불가능’이 아닌 ‘회생’ 그 자체, 비로소 게토가 얼라이브 alive 한 순간이 되었던,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한 거죠.
이 경험은 저에게 있어서 완벽주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모든 일을 진행하는 저의 스타일에 정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으로, 아티스트가 퍼포먼스로 제가 만든 정제된 공간을 컬러풀한 페인트들로 파격 했을 때, 아예 마음을 내려 두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으로 아티스트에게 공간을 전적으로 맡김으로써 제가 상상도 못 한,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비로소 찾게 된 놀라운 경험이자, 발상의 전환이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ARTSYKOO. '성수'라는 지역의 역사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해요. 성동구는 본디 산업화를 지나면서 구로 공단과 함께 대표적인 공장 밀집 지역 었죠. 과거 뚝섬 지역은 현재 과천에 위치한 경마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처럼 지금의 성수동과 같이, 마치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과 같이 산업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은 지역에 파고드는, 다소 거칠고 동시에 영 young하고도 힙한 분위기의 성수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정지선 디렉터님께서 처음에 게토 얼라이브를 성수동이라는 지역에 자리 잡을 때의 이야기, 그 당시의 게토에 대한 구상과 지역 분위기가 끼쳤던 영향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게토 얼라이브' 라는 공간이 위치한 성수동의 역사성과 지정학적 특성에 대해서 탐색해 보기로 했어요. 그리고는 관련 참고 문헌을 찾던 중 미국 디트로이트의 도시재생에 대한 연구 논문을 찾아 읽게 되었죠. 디트로이트라는, 한때 자동차 산업으로 부흥하여 영광을 누렸던 산업도시는 산업의 몰락과 함께 미국에서도 유명한 가난한 지역, 우범지역이 되어 슬럼화를 겪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이런 디트로이트의 역사성을 비추어 볼 때 성수동을 ‘디트로이트’와 병치하여 생각해 보기로 했죠.
(래퍼 에미넴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8 마일 (8 miles, 2002)은 바로 이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하는 몰락한 디트로이트 도시, 산업 그리고 그 폐허나 마찬가지인 환경 속에서 피어나는 힙합이라는 희망 한줄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젊은 청년의 고군분투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이죠.)
사실 제가 게토를 처음 구상하고 실현하는 과정 속의 제 심정은 디트로이트라는 도시에서 ‘음악’이라는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정말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면서 이 공간을 숨 쉬게 하고, 살리고 또 책임지기 위해 노력을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 가던 제 상황과도 맞닿아 있었다고 생각해요.
ARTSYKOO. 초창기 게토를 운영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이는 데다, 아직까지 게토 얼라이브라는 음악공간의 아이덴티티나 그 인지도에 대한 예술계의 인지가 지금과는 달랐기 때문이었겠죠. 이러한 상황에서 금전적으로 게토 얼라이브가 처한 상황에 대한 주변의 걱정 어린 조언들이 많이 있었을 거라 생각되어요. 티켓 이외에 주류나 음료 등을 통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하라는 주변의 권유들이 많았다고 하셨는데요, 이러한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어떠한 고민들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게토가 공연 티켓 판매 수익금에만 의존하고 있을 때, 정말 많은 분들로부터 주류 판매에 대한 제안을 참 많이 받았어요. 물론 게토 얼라이브의 기획공연에서 음료나 맥주를 판매하고는 있지만, 이런 판매로 게토의 수익구조를 전적으로 개선하고자 함보다는 공연의 분위기를 조금 더 스무스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정도의 역할을 하는 선이 제가 생각하는 적당한 타협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게토 얼라이브는 무엇보다도 ‘음악’을 위한 음악 중심의 공간으로 운영되는 것이 디렉션이기 때문에 음악과 주류가 주객이 전도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제가 예전에 홍대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던 당시 제가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앞에서 누군가 음악에 집중하지 않고 술만 마시면서 옆 사람과 시끄럽게 대화하는 관객을 경험하고는 불편한 마음을 느꼈던 경험에서 생긴, 경험에 기반하여 세워진 게토만의 컨셉인 거죠. 특히 음악 공연에 있어서 뮤지션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라면 음악이 중심이 되는 것이 그들의 예술세계를 존중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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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인터뷰는 게토 얼라이브의 정지선 디렉터를 만나다 PART II 입니다. 아직 PART I을 읽지 않으셨다구요? :)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 정지선 디렉터의 음악감독 생활 이야기로 가득 찬 고군분투의 20대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art director ARTSYKOO
ARTSYKOO. 최근의 게토 공연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바로 1세대 즉흥 재즈 뮤지션 ‘최선배’님의 연주, 그리고 현재 국내외 재즈 음악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재즈 뮤지션이자 게토 얼라이브의 주요 연주자이자 조력자인 이선재 님과 최선배 연주자의 트리오 결성이에요. 정지선 디렉터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프로젝트를 구상, 실행하실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게토의 콘셉트가 ‘실험적인’, ‘도전하는’이라는 컨셉이다 보니 대부분의 공연은 2030 뮤지션과 그들의 음악을 즐기는 동세대 관객들이었죠. 그러다 문득 이렇게 너무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만 용인돼 공간이 마치 게토인 것과 같이 흘러가게 되면 게토 얼라이브 정신에 부합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게토라는 공간이 ‘청년’에게만 열려있는 공간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비주류에 대한 주류의 관심을 갖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게토에서 소개되는 "뮤지션의 스펙트럼을 무한히 확장하기 위해 어떤 기획을 하면 좋을 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게토 공간에 "모든 세대가 와서 음악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미 확보된 게토의 젊은 관객층의 관심을 새로운 것에 돌리기 위해서는 1세대, 혹은 “개척자 pioneer”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다,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분을 모셔야겠다 하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월간 재즈 매거진을 통해서 김광현 편집자님의 인터뷰를 통해서 1세대 제즈 연주자분에 대한 기사를 읽었고 이를 통해서 처음으로 “최선배” 연주자님을 뵐 수 있었어요.
최선배 연주자를 처음 게토에 모셨던 날이 생각나네요.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를 차려입고 베레모를 쓴 노년의 신사분이 게토 얼라이브로 들어오셨습니다. 최선배 연주자께서는 정말 온화하신분이셨고, 또 제가 그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진심으로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깊게다가왔어요. 저렇게 대단한 분께서 이런 인품까지 갖추셨다는 점에서 최선배 선생님과의 만남은 감동적이기까지 했죠
게토 얼라이브 초반부터 게토에서 연주뿐만 안니라 기획 과정에도 함께 임하고 있는 재즈 색소포니스트 이선재 연주자와 최선배 연주자가 연주로 밍글 mingle 해서 최선배 트리오를 결성하여 old & new 연주자들이 만나 프리 재즈 공연을 선보일 수 있게 되는 등 정말 많은 음악적 인사이트를 제시하는 공연을 보여준 바 있어요. 그런 국내 재즈 신의 산 증인인, 살아있는 역사와 지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세대를 뛰어넘는 훌륭한 재즈 뮤지션의 커넥터 역할을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보람차고 뿌듯했어요.
그리고 또 한가지 정말 중요하고 뜻깊은 일은 최선배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서 또 새롭게 알게 된 관객분들을 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모임은 정말이지, 제가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의 재즈 음악 스토리 그 자체였어요. 살아있는 한국의 재즈음악 역사가 한 자리에 다 모이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1세대 재즈 신을 만들어갔던 분들 중에는 최선배 연주자님과 같은 분만 계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바로 그런 분들의 음악을 찾아가 듣고, 응원하고, 후원하면서 그 초기 한국 재즈 신의 생태계가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숨은 조력자들이 있었어요. 게토에서 최선배 연주자의 연주가 진행되면서 게토로 찾아와 주신 분들은 이런 1세대 조력자분들이었어요. 은퇴하신 의대 교수님부터 공연장을 운영하셨던 80대 분들까지, 게토로 오시게 된 거죠. 그 시절 한국 재즈 1세대가 태동할 무렵의 연주자, 공연기획자, 공연장 운영자, 후원가, 관객 모두가 게토에서 최선배 선생님을 중심으로 다시 모이게 된 거죠.
그 상황은 정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살아있는 한 음악 씬의 역사들이 모여있는 대단한 일이었죠. 정말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1세대 연주자와 현재의 연주자, 1세대 공연기획자와 현재의 공연기획자, 1세대 관객과 현재의 관객들이 모여게 된 데에는 '최선배'라는 위대한 음악가가 계셨다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해요.
ARTSYKOO. 예술계에서 반평생을 몸담은 정지선 디렉터님에게 최선배 연주자의 삶은 정말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아요. 살아오면서 수많은 연주자와 연주를, 공연을 하면서 보내 온 정지선 디렉터에게 최선배 연주자의 삶은 어떤 의미일까요?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하루는 최선배 선생님 연습실에 찾아갔어요. 자신의 음악팬이 운영하는 색소폰 교습소를 연습실 삼아 현재까지 60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8-10시간을 연습하시죠.
골방에서 60년째 하루 8-10시간을 매일같이 연습하셨던 탓일까요. 제가 방문했을 때 “커피 줄까?”하면서 제게 커피를 건네실 때 처음으로 선생님의 손가락을 봤어요. 그 손가락은 색소폰 핑거링 방향대로 굽이굽이 휘어져 있었고, 저는 정말이지, 최선배 선생님의 그 휘어진 손가락, 그 주름진 손 모양을 잊을 수가 없어요.
몸도 불편하시고 여행용 캐리어에 색소폰을 넣고 끌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으시며 한걸음 한걸음 오늘도 음악을 위해 살아가시는 그 모습에서 저는 진정한 예술가를 볼 수 있었어요. 예술가의 삶.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그저 매일 같이 성실하게 나의 길을 가는 것, 그리고 그 자신만의 삶의 규칙을 평생 실천해나가는, 수행에 가까운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아직 재즈라는 음악 장르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았을 1960년대 70년대 한국 음악 씬에서 프리 재주 연주자로 연주를 하면서 살아가는 일을 상상해보세요. 프리재즈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갖은 무시와 핍박, 심지어 ”귀신이 들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주자로서의 삶을 이어가야만 했어요.
그 모진 풍파를 다 겪어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장장 60년간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가신 최선배 선생님의 삶 자체가 갖는 음악사적 의미는 정말 특별하고 그 어떤 이의 삶보다도 숭고한 숭고미가 있는 그런 삶이라고 생각해요.
최선배 선생님을 뵙고 제가 배운 것은 예술가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엄청난 메시지를 준다고 생각해요. 그건 바로 주변에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고 천천히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가더라도, 설령 변화가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두리번거리지 않고 버티는 삶. 그게 바로 지금의 우리가 최선배 님이라는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레슨이죠. 그냥 앞을 향해서 걸어가면 돼요. 기어가더라도 오늘 하루, 앞으로 나아가면 돼요.
더욱 대단한 건 즉흥 음악의 경우 40분 동안 즉흥으로 풀어내는 것 만해도 정말 어려운 일인데, 최선배 연주자님은 한 시간 반을 즉흥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고 정말이지 이렇게 풀어내는 분은 처음 뵈었죠. 그걸 본 이선재 연주자는 살면서 본 손꼽히는 엄청난 광경이자 공연이었다고 평을 했을 정도였죠.
저에게 의미 있는 일은 영향력 있게 하고 수요를 만들고 그런 기획을 하는 사람, 그게 바로 제가 할 수 있는 음악 씬에서의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ARTSYKOO. 마지막으로 이번 아치쿠가 만난 아트 & 피플 인터뷰에 참여하신 소감을 알려주세요. (바쁘신 와중에도 소중한 시간내어 인터뷰에 열의를 가지고 참여해 주신 정지선 디렉터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JUNG JI SUN (Ghetto Alive Executive director)
* 본 인터뷰는 게토 얼라이브의 정지선 디렉터를 만나다 PART II 입니다. 아직 PART I을 읽지 않으셨다구요? :)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 정지선 디렉터의 음악감독 생활 이야기로 가득 찬 고군분투의 20대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art director ARTSYK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