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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루 Apr 15. 2021

EP.1 나도 일본에서 살아볼까?

새로운 나라에서의 1년은 어떤 삶일까.

드디어 어른이 됐다.


 어른이 돼서 제일 좋았던 점은 경제적인 활동에 제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내 마음대로 돈을 쓸 만큼의 여유는 없었어도 돈을 번다는 활동은 나에게 너무나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번 달 월급 나왔어, 이걸로 생활비에 보태자."

어릴 적부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내 보탬으로 우리 가족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은 진짜 행복이었을까. 나를 위해 진정으로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나?'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들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처럼 내 안에서 솟아났다. 사춘기를 제대로 못 보낸 어른에게 사춘기가 왔다.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의 4계절은 항상 같았다. 울긋불긋한 낙엽들이 아스팔트에 쌓이면 색 바랜 갈색 잎이 되었다. 떨어진 갈색 낙엽들이 포대자루에 한가득 채워지면 서서히 겨울이 다가왔다. 한 겹 두 겹 두텁게 껴입던 옷들이 점점 얇아지고 분홍빛으로 물든 봄이 오고 매미 울음소리가 익숙해지는 여름이 왔다.

반복되는 계절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의 계절을 원했다. 내 안에 있던 역마살이 제대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일본으로 가자!


목적지는 정해졌는데..


 일본 생활정착금 250만 원, 일본어 관련 어학 자격증, 사유서와 계획서를 준비하세요.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었다. 보통 혼자 준비하기 어려울 경우 일본 워킹비자 대행사를 통하면 쉽게 준비할 수 있다. 그렇다고 100프로 합격보장도 아니니 그럴 바에 직접 준비해서 못해도 내 탓, 잘해도 내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일본 워킹홀리데이 불합격 팁들을 많이 찾아봤다. 여자는 만 24살 이상이면 신청을 해도 떨어질 확률이 매우 크다고 했다. 그 글을 읽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딱 만 24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일본어 실력이었다. 초보 여행서적에 나오는 간단한 단어와 내 소개만 가능한 처참한 회화 수준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사가 끝나면 통근버스를 타고 반 기절한 상태로 일본어학원으로 향했다. 회사 시즌과 맞물려 고단함과 동시에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하는데 떨어지면 어떡하지? 엄청 우울할 거야.. 아냐, 딱 한 달만 고생해보자." 조금이나마 생각을 고쳐먹으니 일 끝나고 학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했다.

결과는 합격.  나도 Jlpt N3자격증이 생겼다.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안도감과 불안감에서 해방되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노란색 접수증


 서울에 있는 주한 일본대사관에 가기 전에 서류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확인했다. 한 번에 붙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서류에 구김까지도 신경 썼다. 집이 서울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괜히 사소한 것으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몇 달간 준비한 것들이 서류제출 한 번으로 합격, 불합격으로 나눠질 것을 생각하니 불법적인 일을 한 적도 없는데 왜 죄지은 사람처럼 이리 마음을 초조한 걸까. 줄을 서있는 지원자들 얼굴에도 설렘 반, 초조함으로 긴장한 기색이 여력 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준비해 온 서류를 제출함에 넣고 면접관과는 전화기를 사용하여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콘니찌와. 지코쇼카이 오네가이시마스.(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면접관이 상냥한 어조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와타시노 나마에와...(제 이름은...)"

시작과 동시에 등줄기부터 온몸에 땀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정신없이 인터뷰가 끝이 나고 긴장으로 풀려버린 다리를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면접관에게서 받은 노란색 접수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봤다. 단지 종이에 불과하지만 합격 후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중요한 서류이므로 행여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아침에 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로또보다 더 떨리는 비자 합격 발표


 몇 달 후, 일본 워킹홀리데이 비자 합격 발표날이 왔다. 내가 받아 온 번호가 컴퓨터 모니터상에 표기된 번호와 일치하면 합격이다. 흡사 로또 추첨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ctrl+F키'라면 한 번에 찾을 수 있지만, 내 번호가 없을까 무서워 스크롤로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번호가 있. 있. 다.'

내가 받아온 숫자가 모니터에도 똑같이 적혀있었다. 혹여나 숫자를 잘못 보고 착각하지 않았는지, 몇 번을 번갈아 봤다. 봐도 봐도 내 번호가 맞았다. 어쩌면 이건 신께서 기회를 주신 게 분명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두려웠던 6개월


 그런데 뭐가 그렇게 두렵고 무서웠을까?

합격 결과를 받아놓고도 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비자 발급 후 1년 안에 출국하지 않으면 비자는 무효가 된다. 비자를 받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은 내 나라가 아닌 타국에서 살아본다는 것이 무서워 잔뜩 쫄아있었다. 치한이 있으면 어쩌지, 실패하고 돌아오는 사람 중 한 명이 되면 어쩌지 등 부정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갖가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가기 싫은 이유를 만들어냈다. 두려운 감정에 대한 방어기제로 합리화를 선택했었나 보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아닌 단기체제 비자인 여행자로 말이다. 비록 여행자 신분이었지만 실제 내가 일본에서 산다는 가정을 하며 현지인의 시선에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직접 와서 느껴보니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언니 역시 일본에서 살아봐야겠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동생에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을 보여주고 싶어 함께 온 동생은 이미 내 결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원한 맥주를 받아 한 캔씩 속 시원하게 비웠다. 계속 미뤄두었던 마음의 숙제를 해결한 것이다.



 지금의 내가 20대 후반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시도가 두려워 뒷걸음치지 말자.'

첫발을 그렇게 힘겹게 떼었으면서 왜 망설이고 있어.

괜찮아. 한번 해봐. 지금이 아니면 후회하고 계속 너를 괴롭힐지 몰라.

결국 후회는 자기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직접 해결할 수 없다면 그게 진짜 본인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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