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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Apr 20. 2022

Still loving you, 분홍 소시지

분홍아, 영원히 내 곁에 머물러 줘

오랜 시간이 지나 어린 시절 짝사랑하던 여자를 다시 만나 연인이 되고 함께 가정을 꾸린 느낌이라면 과장된 표현일까?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은 내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내게 분홍 소시지는 분명 그런 반찬이자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음식이다.


식당에 갔을 때 밑반찬으로 잘 구워진 분홍 소시지가 나오거나 배달앱으로 주문했을 때 포장된 반찬 중에 분홍 소시지가 있으면 메인 음식은 먹어보지도 않고 그 음식점에 후한 점수를 주는 걸 보면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혹자는 밀가루 떡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주재료가 어묵이라 하는 등 딱히 맛있을 이유가 없는 이 음식에 내가 열광을 하는 이유는 간절히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없었던 한이 맺혀서이다. 급식을 하는 지금과는 달리 도시락을 싸가던 시절, 이 분은 극히 일부의 상류층 자녀에만 반찬으로 허용되었을 정도로 비싸고 귀하신 몸이었다. 그조차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누군가 분홍 소시지를 반찬으로 가져온 날이면 그날 점심시간은 한바탕 피 튀기는 전쟁터가 되곤 했다.


이토록 몸값이 높으신 분이니 나처럼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빈민에겐 꿈속에서도 맛보기 힘든 존재가 분홍 소시지였다. 당연히 초중고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반찬으로 싸간 적이 없었고 그렇게 켜켜이 쌓이고 맺힌 한은 수십 년이 지나 가정을 꾸리고서야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눈에 붙은 명태 껍질이 채 떨어지지 않아 남편을 하늘처럼 여기던 신혼시절, 아내가 뭘 먹고 싶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분홍 소시지' 다섯 글자를 외쳤다. 뭔가 대단한 요리를(할 실력도 안 되는 사람이면서) 준비하려 했던 아내 입장에선 많이 당황스러웠을 수 있겠으나 그만큼 내겐 간절히 먹고 싶었던 것이 분홍 소시지였다.


지금도 아내는 장을 보러 갈 때면 어김없이 길쭉한 분홍 소시지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아서 온다. 가끔 딸아이가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할 때면 그런 말을 해준다. 

"네가 요즘 맛없다고 남기거나 버리는 음식들 있지? 짜장면이나 바나나 같은 거 말이야. 아빠가 너만 할 땐 그런 거 먹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사 먹지 못했어. 분홍 소시지는 아빠에겐 그런 것들 중 하나야.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비싸서 못 먹는 음식들이 나중에는 흔해 빠진 음식이 될 수도 있거든. 그때가 되면 지금 아빠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내는 어제저녁에도 분홍 소시지를 구웠다. 누가 내게 아내가 언제 제일 이뻐 보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말하겠다. 주방에서 열심히 노릇노릇하게 분홍 소시지를 구울 때라고. 

어쨌든 나는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는 그날까지 분홍 소시지를 영원히 사랑할 것만 같다. 

우리 분홍이 없었으면 뭔 낙으로 밥을 먹을꼬. 

벌써부터 퇴근 시간이 기다려진다.

I'm Still loving you 분홍 소시지, 분홍 소시지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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