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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Apr 19. 2022

나를 깨운 한마디 말

나에겐 또 다른 이름이 하나 있다

살아오면서 칭찬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1등이 당연시되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항상 형들과 비교대상이 되어야 했고 상대적으로 나는 늘 뒤떨어진 아이 취급을 받곤 했다. 오죽했으면 큰 형수님께서 신혼 시절 웃으시며 "우리 막내 도련님도 다른 집에 가면 충분히 큰소리 칠 수준인데 어쩌다 이 집에 태어나셔서 이런 대우를 받으세요?"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설상가상, 나이를 먹고 가정을 꾸린 후에는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 경상도 사나이 같은 아내를 만난 탓에 좋은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 남들은 남편이 무뚝뚝해서 애정 표현을 해주지 않아 문제라던데 우리 집은 그와 정반대다. 대화를 나누다가도 내가 조금이라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면 아내는 내일모레 환갑이 다 된 아저씨 같은 말투로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라며 분위기를 깨기 일수다.


이런 내가 뒤늦게 나이 50이 다 되어서야 진심이 담긴 칭찬을 들은 적이 있다. 4년 전 도서관 산하 문화센터에서 진행했던 서예교실에서였다. 아내에 대한 서운한 감정과 기대만큼 오르지 않는 매출로 인해 스트레스가 정점에 이르렀을 무렵 찾은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과 수강생들은 뒤늦게 만난 인생의 참스승 같은 분들이셨다. 


6개월 정도 배웠을 때 글씨  사진 출처 : 본인 아이폰

서예를 시작한 지 6개월을 넘어설 무렵쯤으로 기억된다. 그날따라 선생님께선 내가 쓰는 글씨를 유심히 살펴보며 말씀하셨다.

"우리 사장님은 글씨만 보면 아주 여성스러운 면이 있어요. 아마 나중에 공모전에 출품하면 열이면 열,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여자가 쓴 글씨라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보기에 사장님은 화를 잘 내지도 않고 양보심 강하고 웬만한 일에 대해선 그냥 져주는 그런 성격 같습니다. 참을성도 있고 신중하고 세심한 성격 같은데 맞나요??"


너무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신 한마디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생님, 글씨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 성향이 보이나요?"


"그럼요. 글을 대하는 자세나 획 하나하나 긋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보입니다. 사장님 본 것도 벌써 반년이 넘었는 데다가 제가 오래전에 역학을 따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장님은 안에 쌓인 게 많아 보이는데 그런 거 계속 쌓아두면 병이 됩니다. 되도록 빨리 털어내도록 하세요."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보기에도 우리 사장님은 스트레스로 살이 찐 거 같아. 가슴속에 한이 많이 맺힌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거든."

내 옆에서 글을 쓰시던 칠순을 앞둔 선배 어머님께서도 맞장구를 치셨다.


그때 알았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져진 내공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이는 단순히 숫자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수강생 30여 명 중 유일한 남자이자 나이로는 막내급에 가까웠던 나는 많은 누님들과 어머님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부부관계의 상담에서부터 앞으로 살아갈 인생 전반에 대한 얘기까지 그분들이 한 번씩 흘러가는 식으로 해주시는 한마디 한마디가 내겐 큰 가르침이었다.


새로운 이름을 받던 날, 선생님께선 평생 '먹'을 사랑하는 집안이 되라는 의미로 내게 '호묵헌'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셨다


그 말을 들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선 다가올 서예 대전에 내가 출품할 것을 권유하셨다. 적게는 몇 개월, 많게는 1년 이상 나보다 먼저 배운 선배님들을 두고 경력 1년 미만인 내가 출품을 하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맞지 않다는 생각에 출품하지 않겠다는 뜻을 넌지시 말씀드려봤지만 선생님께선 요지부동이셨다.


"우리 호묵헌은 글을 씀에 있어 성품이나 실력, 자세 등을 다 종합했을 때 지금 쯤 출품을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글을 쓸 때 성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꾸준히 하던 방식대로 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호묵헌처럼 하나의 목표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계기로 엄청난 잠재력이 폭발하는 사람도 있지요. 제 눈이 틀리지 않다면 호묵헌은 이번 서예대전에서 좋은 결과 얻을 겁니다."


신하(臣下)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主君)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했던가. 서예 대전 공지문이 발표된 이후 온 여름 내내 하루를 이틀처럼 생각하며 글을 썼다. 출품일이 다가올 무렵에는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밥도 먹지 않고 붓을 들었다. 



어디 내놓기 몹시 부끄러운 출품작

그 결과 나는 그 해 서예대전에서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많은 선배님들이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냈다고 했다. 만 1년 가까운 시간이라곤 하지만 일주일에 2~3시간 남짓, 압축하면 100시간 정도 되는 시간을 배워 수상을 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고 했다. 모두들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셨지만 나는 수상의 기쁨보다 그 시간 동안 인생을 배울 수 있었던 게 더 크게 다가왔다.


50년 넘는 인생 중에 채 2년이 되지 않는 짧은 만남 속에서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 내겐 잊지 못할 기억이지만 그 아름다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때마침 시작된 코로나 19 사태의 여파로 장기간 휴강이 결정되고 그와 동시에 많은 선배 누님들이 남편의 직장 문제로 하나둘 뿔뿔이 흩어지며 막을 내렸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나를 알아주고 믿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꽤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처럼 오래 지속된 관계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지만 나처럼 우연한 기회에 맺은 인연 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지금도 나는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뭘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꾸준히 하면 가진 잠재력을 발휘할 날이 올 거라는 말씀,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말씀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에 있어 커다란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과연 나의 잠재력은 어디까지일까?

남은 인생, 내겐 그것을 증명해야 할 과제가 남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나도 누군가에게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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