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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Oct 12. 2022

매일 만나는 주말 부부랍니다. 여전히

쉼표 하나 찍지 못하는 인생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부부는 주말 부부 아닌 주말 부부의 삶을 살고 있다. 두 사람을 골고루 닮은 딸아이가 생겼다는 것과 세 식구가 겨우 몸 하나 누일 정도의 작은 아파트 하나를 장만했다는 것뿐 처음 장사를 시작한 이후와 비교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포자기의 심정을 가지기도 했고 막연히 남들을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많은 걸 내려놓고 산다. 그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간을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 잡을 때가 많다.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지만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늘 내 곁을 지키는 아내에 대한 감정이다. 성격이 무던해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을 뿐 그 속은 말이 아닐 텐데 변함없이 잘 버텨주는 것이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장사를 시작한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 되니 최근 들어서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고 인생 2막을 여는 분들의 이야기에 눈길이 자주 간다. 대부분 구체적인 계획을 잡은 후 사직서를 내고 준비하셨지만 그런 분들 중에는 보기에 따라 아무런 대책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는 분도 계셨다.


몇 년 전 가게 인근에서 고깃집을 운영하시다가 장사를 그만 두신 사장님이 후자에 가까운 유형이었다. 10년 가까이 장사를 하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기로 했다며 인사하러 오신 사장님께 돈은 많이 모으셨는지 앞으로는 뭘 하실지 물어봤었다. 돌아온 사장님의 대답은 내 기준에선 이해하기 힘들 만큼 여유가 넘쳤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이렇게 안 하면 절대 못 쉬잖아요. 10년 고생했으니 1~2년 정도는 쉬어야지. 집사람도 나도 일하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졌는데 당분간은 재충전할 시간을 가져야죠. 앞으로 뭘 하며 살 건지는 쉬면서 다시 생각해보는 거고. 뭘 하든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냐고."


짧은 인사와 함께 덕담을 건네고 떠나시는 사장님의 뒷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배운 아이가 멈추면 쓰러질까 무서워 쉴 새 없이 페달을 돌리듯, 뒤쳐지고 도태될 것이 두려워 쉬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던 나는 이제까지 뭘 하고 살았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긴 문장에도 쉼표가 필요하고 악보에도 필요에 따라 쉼표가 있는데 장사를 하는 동안 나는 쉼표를 찍지 못했다. 물론 일반 개인사업자와는 달리 프랜차이즈 특성상 계약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보다는 용기를 내서 선뜻 저지르지 못한 내 탓이 더 컸다. 어느덧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나이가 되니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모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김준현 씨가 자신의 소원은 작은 국숫집을 차려 저녁 7~8시쯤 마감한 후 나머지 시간들은 초대한 지인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날 같이 출연한 유재석 씨도 그 말에 맞장구치며 자신도 작은 카페 하나 차려 커피를 핑계 삼아 실제 목적은 수다를 떠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 방송을 보니 한창 사진을 찍으러 다닐 때 동호회 사람들과 자주 찾던 ‘삼소방'이란 찻집이 떠올랐다. 은퇴를 해도 몇 번을 했을 만큼 연세 드신 노부부가 운영하시던 그곳은 개인당 5천 원의 이용료만 내면 마시고 싶은 차를 무한대로 마실 수 있고 때로는 사장님께서 그날 갓 덖어낸 이름마저 생소한 차를 무료로 시음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두 분 모두 돈벌이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분들이셨다.


매장 내부는 여기저기 박스와 각종 집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찻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창고에 가까웠고 차를 마실 공간이라고 해봤자 큼지막한 방 하나만 있을 뿐 깔끔한 인테리어를 자랑하거나 분위기가 괜찮은 찻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별히 차를 즐기지 않는 내가 아직까지 그곳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부부의 온화한 미소와 아낌없이 베푸는 넉넉한 인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먼 훗날 은퇴란 것을 하게 된다면 사장님 내외처럼 늘 평온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베풀어가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이들에게 성심성의껏 대접을 할 수 있는 공간, 커피 향보다는 사람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곳을 만들어 고객들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도 풀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었고 지금도 막연히 그런 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다.


인생 100세 시대라 보면 이제 겨우 후반전에 접어든 셈이지만 나이 쉰을 넘긴 이후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한다. 50세 이전의 삶이 동화 속 개미와 베짱이처럼 극과 극을 내달리는 삶이었다면 남은 인생만큼은 조금 덜 벌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람답게 살다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날이 언제 올 지 알 수 없고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힘겨운 진행형의 삶이지만 늘 가슴속에 꿈 하나만은 간직하고 산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먼 훗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나긴 여정의 책을 덮는 순간, 우리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잘 살았노라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새벽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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