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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Oct 07. 2022

고객님, 제가 이혼을 해야 하나요?

제가 직원 해고 권한이 없는 바지 사장이라....

아내와 낮과 밤을 나눠 일하다 보면 가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생길 때가 있다. 자주 오시는 손님들 대부분 우리 두 사람이 부부이고 교대로 일하는 것을 알지만 특정 시간대에만 방문하는 고객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쉽게 말해 부부가 각자 자신만의 단골 고객을 맞이하는 셈인데 간혹 그런 분들 중 평소 오던 시간대와 달리 가게를 찾았다가 우리 두 사람이 부부 사이임을 모르고 말실수를 할 때도 있다. 새벽에 기원에서 바둑 두는 친구분들과 가벼운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우리 가게를 찾으시는 어르신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오실 때마다 꼭 필요한 말씀만 하시고 늘 점잖은 표정과 함께 매너를 갖춘 분이셨는데 언젠가 한 번은 정색을 하며 내게 일장연설을 한 적이 있다. 늘 그렇듯 막걸리 두 병과 안주를 들고 카운터로 오신 어르신께선 물건을 놓자마자 내게 "앗따, 낮에 일하는 그 가시나 진짜 못 됐더라."라며 말을 꺼내셨다. 


평일, 주말 통틀어도 일하는 직원이 몇 안되기도 하지만 다들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불친절한 성격이 아니기에 그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20여 년 가까이 장사를 하며 우리 점포에 대해 정식으로 클레임을 제기한 것이 정확히 세 번이고 그 모두가 아내가 주인공이었기에 이번에도 또 특유의 까칠한 성격이 발동했나 보다 생각했다.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으나 어찌 됐든 클레임이 제기되었으니 전후 사정은 들어봐야 했다.


늘 그렇듯 사건은 그냥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오실 때마다 항상 현금결제만 하는 고객님이었기에 배려 차원에서 거추장스러울 법한 동전을 거스름돈으로 드리지 않고 따로 모아뒀다가 오실 때마다 거기서 봉투값을 차감한 게 발단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 일어난 일을 알 리 없는 아내 입장에선 고객님을 몇 푼 안 되는 봉투값을 내지 않으려고 없는 말을 지어낸 사람으로 오해했고 고객님 입장에선 이미 합의 본 사항인데 왜 봉투값으로 이중 지출을 해야 하냐는 주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양자 모두 잘못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고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더라면 나는 속는 셈 치고 우선 고객의 뜻대로 해드린 후 따로 조치를 했을 테지만 원칙주의자인 아내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아내는 정석을 중시하고 상대방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면 전투 개시와 함께 강력한 응징을 하는 유형임에 반해 나는 정석보다는 변칙을 좋아하고 실리를 추구하며 전투가 벌어질 것 같으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유형이다.


나와 고객님의 합의는 어찌 보면 변칙이고 편법일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곧이곧대로 일을 처리하는 아내에게 원칙에 어긋난 요구를 하니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비교적 차분하게 말씀하시면서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한 고객님께 웃으면서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는 직원 교육을 잘 시키겠노라 말씀을 드렸다.


고객님께선 내 얼굴을 봐서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가게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그런 직원은 내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문제의 당사자가 아내임을 밝히지 않았던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어르신 뭘 그만한 일로 사람을 내보내고 말고 합니까? 제가 직원 해고 권한도 없을뿐더러 그 사람 내보내면 집사람 대신 일할 사람 또 뽑아야 되는데 그러면 인건비 부담이 너무 커지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를 데려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고객님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그동안의 당당했던 태도는 온 데 간데 없이 말까지 더듬으시며 이제까지 했던 말 모두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하셨다. 사모님께 큰 실례를 범한 것 같다며 절대 집사람에겐 비밀로 해달라며 신신당부를 하신 고객님은 그 길로 도망치듯 가게를 나가셨다.


사실, 이런 비슷한 일은 수시로 겪는다. 간혹 몇 시 타임에 일하는 누구는 어떻더라, 주말에 일하는 애는 이러저러하더라 식으로 생중계하듯 말을 전하는 이들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아내에 대한 얘기들이다. 다들 우리가 부부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무심코 하는 말들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이 들릴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성격이 불같은 아내가 행여 손님과 다투던 중 피해를 입거나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퇴근하고도 편히 쉬지 못할 때가 많고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아내에게 성질 좀 죽이고 좋게 좋게 해결하라고 틈날 때마다 이르긴 하지만 천성이 그리 쉽게 변할 리 없으니 아내 홀로 가게에 두고 올 때면 늘 강가에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둔 것처럼 불안함을 감출 길이 없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어르신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고 아내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너무 원칙만 따지지 말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게 어떠냐고 말한 적이 있다. 남편 된 입장에서 아내에 대한 뒷얘기들을 듣는 고충도 좀 알아 달라는 내 말에 아내는 한참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


"이 보세요, 아저씨. 낮에 있으면 당신 욕하는 손님들 엄청 많아요.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뭘 물어도 할 말만 하고 입 닫아버려서 말 꺼내기 무섭다고. 나도 그런 말 들으면 기분 안 좋거든.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고 그래?"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의 역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남 탓을 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봤어야 했는데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그날 이후 우리 두 사람에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내는 예전에 비해 융통성을 많이 발휘하려 노력하고 나 또한 고객들에게 조금이나마 먼저 다가가려 애쓴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게 고객 응대이다. 사람마다 원하는 서비스의 수준도 다르고 누군가에겐 친절로 비치는 것이 다른 누군가는 간섭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이 경험했다. 고객 응대에 있어 정답은 없고 여전히 많이 부족함을 잘 알지만 그때 그 경험이 우리 부부가 장사를 함에 있어 한 뼘 더 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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