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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y 24. 2022

아저씨는 누구세요?

'엄마 바라기'였던 딸과의 전쟁 같은 육아

아이를 싫어했고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어릴 때 다른 아이가 어머니 근처로 오면 온몸으로 막아서고 그마저도 안될 땐 힘을 써서라도 떠밀어낼 정도로 싫어했다고 하셨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런 나를 두고 막내 특유의 질투가 폭발한 거라고 입을 모아 수군거리셨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연애를 할 때도 첫 번째 조건이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말자는 것이었을 정도로 자유 영혼이었던 내게 육아는 넘을 수 없는 큰 산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유아기를 넘길 때까지는 아내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가게에서 일을 하며 육아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아내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아이를 키웠다. 과하다 싶을 만큼 애정을 주는 게 유일한 흠이라면 흠일 정도로 만점짜리 엄마였지만 그게 훗날 문제가 될 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 3년간 가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낯가림이 없던 딸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아빠인 나를 낯설어했다.


엄마 바라기 시절 모녀, 사진 출처 : 아르웬 블로그, 경남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는 탓에 내가 자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오후 서너 시 무렵부터 밤 10시 전후까지였다. 아무도 없는 오후 시간대엔 그나마 괜찮았지만 아이가 유치원을 마치고 아내와 집에 온 저녁 시간이 되면 고통이 시작되었다. 한창 활발하게 뛰어놀아야 할 시기였던 만큼 아이는 악기를 포함한 각종 장난감으로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게 다반사였고 때로는 깊이 잠든 내게 다이빙을 하듯 온몸을 던져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아이는 잔뜩 주눅이 든 채 방을 나갔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잠자는 나를 배려하기 위해 아내는 방문을 닫고 아이가 절대 그쪽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간혹 아이가 그 명령을 어기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아이에게 큰소리를 질렀고 호통 소리에 놀라서 우는 딸아이는 강제로 거실로 끌려 나갔다. 비슷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내가 아이를 대면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아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3교대 근무를 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나였기에 그 누구보다 아이의 마음을 잘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주간 근무, 야간 근무, 비번을 번갈아가며 하시던 아버지께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서 주무시거나 쉬실 때마다 늘 집 밖으로 쫓겨나는 서러움을 겪었기에 아이를 낳더라도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밤샘근무에서 오는 고단함과 누적되는 피로, 그런 나를 위해 아빠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하는 아내의 배려, 이 두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지며 아이와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주말에 겨우 시간을 내서 같이 있을 때도 아이는 항상 엄마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끔 함께 외출을 했을 때는 더 심각했다. 아내가 화장실을 가거나 뭘 사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기라도 하면 아이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급기야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주변에 같이 놀아줄 친구도, 형제자매도 없었기에 딸아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아내뿐이었고 태어나서 3년이란 시간 동안 엄마만 보고 자랐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보다 못한 아내는 내게 유치원 하원 시간만이라도 함께 해주면 어떻겠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 한 몸 추스리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사자인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고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아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부모 자식의 관계는 시기를 놓치면 더 멀어진다는 것을 직접 경험을 했던 터라 하루라도 빨리 아빠의 존재를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고행이 시작되었다. 밤새 일을 하고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집안을 대충 정리한 후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아이를 데리고 오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처음 한동안은 데리러 가는 나도, 가게에 있는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딸아이도 힘들었다. 선생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유치원 인근에 있는 가게로 가던 아이는 내 손에 이끌려 강제로 집으로 향했다.


억지로 손을 잡아 이끌 때면 딸아이는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질질 끌려오기도 했고 가끔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려는 아이와 실랑이를 벌일 때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납치범으로 오해를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씻기려는 나와 씻지 않으려는 아이 사이에 고도의 심리전이 계속되었다. 


아이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그 생활이 2개월을 넘겼을 때였다.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에 몇 마디씩 말을 꺼냈고 집 주변에 피어있는 꽃을 보며 꽃 이름을 묻기도 했다. 이전의 하원이 강제가 동반된 속도전이었다면 이후의 하원은 여유가 깃든 진정한 동행이 된 셈이었다.  


집에 와서 씻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경직된 자세로 나무처럼 서있던 아이가 조금씩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할 때 손으로 물을 받았다가 내 몸에 뿌리기도 했고 비누거품을 손에 잔뜩 뭉쳐 내 얼굴에 묻히며 깔깔대기도 했다. 욕실에서 한바탕 수중전을 펼치고 나오면 온몸이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와 가까워질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문제는 그다음 과정이었다. 지금도 그때로 되돌아가서 하라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단 하나, 머리를 말리고 빗는 과정만큼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당시 심각한 공주병 증세를 앓던 아이는 항상 허리까지 내려오는(조금 과장했음) 긴 머리를 고집했었다. 긴 생머리를 말리는 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몰랐고 엉킨 머리를 빗는 것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어떨 땐 아내 몰래 아이를 미용실에 데려가 쇼트커트를 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이것은 고데기인가 고양이인가. 당시 내게 꼭 필요했던 고영희 씨.     사진 출처 : 인터넷에서 떠도는 사진 캡처


어쨌든 아내가 내게 준 미션은 거기까지였다. 저녁은 자신이 퇴근 후 먹이겠다고 했지만 어디 육아라는 게 계획대로 되는 것이던가. 하원에서 씻기고 말리고 옷 갈아입히기까지 모든 과정이 끝나면 아이는 어김없이 배고프다고 성화였다. 아내가 미리 준비해둔 밑반찬으로 먹이는 날이 대부분이긴 했어도 한 번씩 단식투쟁에 들어갈 때면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다 발휘해서 입에 맞는 밥상을 차려야 했다.


매일 반복되는 미션 수행은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 후 아내의 퇴근과 함께 끝을 맺었다. 뒤늦게 잠을 청해 봤자 고작 두 시간 남짓, 그 시간이 지나면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비몽사몽간에 출근을 해야 했다. 길게 잡아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4시간이었을 정도로 강행군을 하던 고행은 유치원 3년, 그리고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을 넘어서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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