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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Nov 09. 2022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더니

장사도 바둑과 많이 닮았더라

은퇴를 하고 체계적으로 배워 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둑이다. 한 때 꽤 관심을 갖고 바둑 잡지를 정기 구독까지 하며 독학을 해서 한국기원 기준 7급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20년 가까이 손을 놓고 살다 보니 지금은 거의 초보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바둑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다시 시작하겠다 마음먹기를 수십 번, 그때마다 번번이 발목을 잡은 것은 먹고사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들어 바둑을 두며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어르신들 영상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식으로 배우기 전 미리 감각이라도 익혀두기 위해 정지되었던 바둑 사이트의 아이디도 되살리고 바둑과 관련된 괜찮은 앱도 다운로드하며 조금씩 준비를 하게 되었다.


흔히 바둑을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넓게 펼쳐진 반상(盤上)에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나가며 한 수씩 돌을 놓는 포석 단계를 지나 치열한 전투가 있고 더 이상 둘 곳이 없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많은 일들을 겪은 후 삶을 마무리하는 것과 닮아서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장사를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처음 가게 문을 열 때만 해도 최대한 짧은 기간 내에 '성공'이란 성적표를 받으리라는 그럴듯한 계획을 세웠지만 크고 작은 몇 번의 전투를 치르며 처음 마음먹었던 것과는 동떨어진 결과물을 얻을 때가 많았다. 그 과정 중에 멀쩡하게 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던 돌이 어느새 사석이 되는 것처럼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기도 했고 그와 반대로 죽었다고 생각했던 돌이 기사회생하듯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던 적도 있었다.


젊은 시절 한 때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 불리던 유창혁 9단의 바둑을 좋아했다. 그의 화려한 행마와 날카로운 공격에 열광하던 나는 실력도 안되면서 바둑을 두면 무턱대고 공격 일변도로 나가기만 했다. 바둑판 위에서 내가 죽든가 상대방이 죽든가 둘 중 하나만 존재하는 이런 무모함과 욕심은 현실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자신의 돌을 다 살리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그 무리수를 만회하기 위해 악수를 연이어 두는 바둑 초보자처럼 장사를 처음 시작할 무렵엔 단 하나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했고 최대한 많은 걸 손에 쥐고 말겠다는 욕심을 부리기도 했었다.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바둑 격언처럼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 뜻을 제대로 몰랐던 그때엔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다가 큰 것을 놓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적당히 실리를 차지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고 때로는 타협과 양보를 하며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했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에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빠른 시일 내에 번듯하고 화려한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생각은 모래 위에 성을 짓겠다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것이었다.


그렇게 초심을 잃고 과욕을 부릴 때마다 바둑판에서 한가한 수를 둔 나를 추궁하듯 위기가 찾아왔다. 어떻게든 타개를 하고 가까스로 위기를 돌파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 집은 상대방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오그라들었다. 남의 집이 커 보이면 바둑 진다는 말이 있듯 다른 이들의 삶을 부러워하고 막연히 그들을 따라가겠다는 생각을 하면 인생이 고달픈 법인데 그 당시엔 그걸 전혀 알지 못했다. 


얼마 전,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유창혁 9단이 두는 바둑을 본 적이 있다. 단 한 판으로 모든 것을 다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젊은 시절과는 사뭇 다른 기풍에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전 같으면 맞받아칠 상황에서도 적당히 물러서고 타협하는 그의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


지난달 말 실로 오랜만에 바둑 사이트에 접속을 하고 연습 삼아 몇 판을 두었다. 실력이 급성장할 만큼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하진 않았지만 예전과는 달리 무모하게 뛰어들어 싸우다가 낭패를 겪고 돌을 던지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 나를 보며 많이 놀라기도 했다. 공격 일변도의 바둑 성향이 현실 속 장사에서 그대로 나타났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20년 넘는 장사 생활을 통해 익히고 터득한 여유와 관대함이 이제는 대국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인생도 바둑으로 치면 중반전을 넘어 서서히 마무리를 준비할 시점이다. 반면(바둑판)만 놓고 보면 아직은 많이 밀리는 형국이고 단순히 승패로 따지자면 패배에 가깝지만 언제부턴가 그랬듯 지금은 승패에 있어서는 초연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마지막 한 수를 놓는 그 순간까지 그저 최선을 다 하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잘 알기에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따름이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신산(神算)이라 불리던 이창호 9단의 컴퓨터 같은 끝내기 능력으로 더 이상의 실수나 실패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인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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