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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30. 2023

무거워진 가방, 더 무거워진 내 마음

뒤늦은 고향 방문 후의 여러 감정들

명절 때마다 늘 그랬다. 일하는 직원들의 편의를 봐주느라 연휴 때엔 아내와 나 둘이서 맞교대로 일하고 근무 시스템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다음 주 주말이 되어서야 뒤늦게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은 우리 부부가 매년 겪는 흔한 풍경중 하나이다. 올해 설날도 마찬가지였다. 연휴 때 쌓인 피로가 미처 풀리기도 전인 지난 토요일 시간을 내서 고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열차를 예매했기에 정해진 시간 내에 할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밤을 새워 일한 후 아침에 출근한 근무자에게 전달사항을 전하고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차를 몰아 집으로 가서 모든 준비를 마친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전날 치아 교정을 하는 바람에 컨디션이 엉망인 딸아이도 피로에 찌들어 입술 양쪽이 갈라진 아내도 오랜만의 나들이에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겨우 1시간 남짓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에도 여행처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두 여자의 모습에 지켜보는 나는 그저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작년 가을 찾아뵌 이후 처음이라 몇 개월밖에 되진 않지만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래된 TV, 냉장고, 세탁기가 연이어 고장 나면서 그 수습을 오롯이 혼자 도맡아 했었다. 이번 방문의 1차 목적은 새로 들인 가전제품을 이상 없이 잘 사용하고 계신가 확인하는 것이었다. 통화를 할 때면 아무 이상 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고 막내아들 잘 둔 덕에 늦게나마 호강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절대 그렇지 않으리란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간 김에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집에 들어서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가장 문제가 될 것 같은 세탁기부터 살폈다. 설치는 제대로 되었는지 사용하기에 불편함은 없으신지 요모조모 살펴보는데 나를 따라오신 어머니께서 대뜸 "안 그래도 내가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라며 말을 꺼내셨다. 예전에 쓰시던 모델과는 달리 다이얼을 돌려 빨래 종류를 선택하고 디지털 터치식으로 바뀐 세탁기 버튼에 적응을 못하고 계시는 어머니께 대충 설명드리고 나머지 세부적인 내용은 아내가 설명하도록 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문제 있으면 말씀하시라고 해도 아무 문제없다고 그러시다가 정작 눈앞에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그제야 어머니께선 슬그머니 실토하셨다. 언제부턴가 나는 마치 범죄 용의자를 검거하고 범행 일체를 자백받은 후 여죄를 추궁하는 형사가 되어야 했고 어머니께선 지은 죄 없이 마지못해 대답해야 하는 죄인이 되곤 하셨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속 시원하게 다 말씀해 주시면 일처리 하기가 훨씬 쉬울 텐데 왜 그러시는지 그 마음을 알 길이 없다. 물론 지 새끼 앞에서는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 어미의 동물적 본능임을 잘 알기에 어떻게든 이해하려 해도 그게 잘 안된다. 


점심식사 후 함께 상을 치우며 어머니의 손과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 꼬맹이 시절에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가 온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지팡이에 의존해 걸어가는 할머니를 보고 엄마도 나중에 저렇게 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사람이 나이 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엄마의 말에 엄마는 절대 저렇게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당시 어머니 나이가 지금의 아내보다 더 젊었던 시절이었으니 그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머니께선 팔순 노인이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한 달에 한번 팔공산 정상까지 오르셨던 어머니께선 최근 들어 손과 얼굴의 주름 깊이에 반비례하여 활동반경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런 중에도 막내아들 내외가 온다는 소식에 좋은 물건을 한 푼이라도 더 저렴하게 사기 위해 멀리 있는 대형 시장까지 다녀오셨다. 참기름, 고춧가루에 이어 당신은 단 한 번도 사드신 적 없는 체리 한 바구니를 손녀가 잘 먹는다고 사놓기도 하셨고 막내며느리가 좋아하는 감 말랭이 한 봉지도 사놓으셨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짐을 챙기는데 어느새 어머니께서 싸주신 물건들로 가방이 가득 찼다. 올라오는 길에 열차 안에서 책이라도 읽을까 싶어 달랑 책 한 권 넣고 온 빈 가방이었다. 터지지 않게, 쏟아지지 않게 차곡차곡 담는 중에 옆에 계신 어머니께서 "내가 이제는 힘도 없고 해서...... 앞으로 해봤자 너거들한테 몇 번이나 더 해줄 수 있겠노."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왜 며느리, 손녀 것만 챙기고 내 것은 없냐며 따졌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약과 10개를 꺼내 오셨다. 예전 같았으면 먹지도 않는 거 들고 가기 귀찮다고 외면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감사한 마음과 함께 받아 넣었다.


이윽고 예매해 뒀던 열차 시간이 다 되어 가방을 둘러매고 집을 나서려는데 조금 전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귓속에 맴돌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룻밤이라도 자고 오면 좋겠지만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기 힘든 직업이라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대문을 나서는데 앞으로 나는 여기를 몇 번이나 더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짊어진 가방 무게만큼이나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부쩍 수척해지신 두 분을 두고 나오는 발걸음도 덩달아 무겁게 느껴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떠나는 아들 내외 뒤에 서서 오늘도 일하러 나가냐고 묻는 어머니 말씀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나이 오십을 넘긴 아들임에도 여전히 나를 아픈 손가락 보듯 바라보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 늘 답답할 뿐이다.


집에 오자마자 짐 정리를 끝낸 아내는 저녁 근무를 위해 출근했고 나는 야간 근무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늘 겪는 일이라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고향을 다녀오면 마음이 불편하다. 올해는 유난히 더 그랬다. 해를 넘길 때마다 점점 쇠약해지시는 부모님, 시댁에 다녀와서 쉬지도 못하고 일하러 나가는 아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얼굴 뵙는 즐거움도 잠시일 뿐 집에 오자마자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딸아이까지 모두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여러 생각들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과연 이게 사람 사는 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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