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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y 03. 2022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어떤 날

그러나, 그날은 반드시 온다

나이 쉰을 넘고 보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것이 50세 이전의 삶이었다면 지금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떠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떠안은 기분이다. 물론, 수많은 인생의 선배님들에게는 때 이른 건방진 말처럼 비칠 수도 있고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 계신 부모님에겐 이보다 더한 불효스러운 말이 어디 있겠냐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생각은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언제부턴가 내 머릿속은 '품위 있게 늙어가는 법', '인생의 아름다운 종지부' 같은 문장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존과 생활이 인생의 주된 화두였던 것이 이제는 '정리'와 '끝맺음'이란 단어로 바뀌어 가는 셈이다.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그 끝에는 항상 내가 죽은 후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남게 된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앞둔 1984년 12월 초로 기억한다. 새벽 4시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깬 나는 그날 난생처음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부엌 구석에 주저앉은 흐릿한 실루엣 속 어머니는 “아..... 아버지....."라는 짧은 한마디 말과 함께 행여 자식들이 깰까 울음을 참아가며 소리 죽여 흐느끼셨다. 외할아버지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나셨다.


철저하게 시댁 위주로 사셨던 어머니께선 그전까지 외갓집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두 분 모두 살아 계셨지만 내 기억 속 외갓집은 항상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명절 때도 늘 할아버지 댁만 찾아뵈었고 몇 날 며칠을 할아버지 댁에서 머무는 한이 있어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외갓집을 간 적은 없었다. 우리 집에서 외갓집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어처럼 여겨졌고 내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분들이셨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어머니께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 풀어놓으셨다. 대단한 성공담이나 반전 스토리는 없었지만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항상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느낌을 받았었다. 뼈대 있는 양반처럼 늘 기품 있게 사셨다는 외할아버지, 단 한 번도 크게 화를 내신 적이 없으며 가진 것 없어도 평생을 베풀며 사셨다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것과 나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외할아버지의 딸로 살았던 어린 시절 어머니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내게 안겨주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어머니께선 돌아가실 무렵 외할아버지의 연세가 되었고 나는 그때의 어머니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집안 대대로 귀한 딸의 아빠가 된 지금, 과연 나는 결혼 전 나 자신과 했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다른 건 못해도 오랜 시간 함께 있어주고 딸에게 많은 추억들을 안겨주리라 했던 다짐은 세월이 흐르며 점점 희미해진 게 현실이다. 적어도 자식에게만큼은 최선을 다 하려 노력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작년 이맘때 갓 중학교에 입학한 딸아이 신경성 위염에 걸려 한동안 한의원에 통원치료를 했던 적이 있다. 하필 예민한 내 성격을 물려받은 딸아이는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했고 그로 인해 병까지 얻은 상황이었다. 침을 맞는 동안 학교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와 내 경험들을 말해주며 장시간 대화를 했었는데 옆 침대에서 진료하던 간호사가 그걸 들었던지 침을 뽑으러 와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버님은 어쩜 그렇게 딸과 사이가 좋으세요? 이 정도로 말 잘하는 아이인 줄 몰랐어요. 지난번에 엄마와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네요. 제가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는데 이렇게 대화를 잘하는 부녀 사이는 처음 봐요. 아버님 비결이 뭐예요? 우리 신랑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비결요? 엄마가 무뚝뚝한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랄까. 아내가 그런 면에서 부족하니 제가 대신 채워야죠. 그리고 사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얘기 들어주고 얘기해주는 거.”


실제 그랬다. 남들처럼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시간의 여유도 없거니와 고가의 선물들을 선뜻 안겨줄 경제력도 갖추지 못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돈 안 드는 입놀림밖에 없었다. 그 점이 늘 딸아이에게 미안할 뿐이었고 딱히 지은 죄 없는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딸아이가 이대로 나이를 먹고 독립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어준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우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야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어느 여성분이 올린 장문의 글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전체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연 마지막에 나왔던 몇 줄의 문장만큼은 방금 들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큰 울림을 주었다. 


아빠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제게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하고 떠나시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채 돌아가셨지만

저는 아빠로부터
아빠와의 추억이라는 수많은 기억들을 선물로 받기만 한
못난 딸입니다.


잔잔하게 깔리는 BGM에 젖어든 DJ의 차분한 내레이션을 듣는 순간 세상 모든 아빠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1984년 겨울의 내 어머니 모습이 생각나서, 그리고 먼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내 딸의 모습이 거기에 더해져서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글 쓰신 분이 옆에 있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후로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젠가 나도 생을 마감하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영원히 내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 어떤 날, 부디 딸아이가 아주 조금만 슬퍼했으면 한다. 어릴 적 공놀이를 하다가 넘어지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났던 것처럼 하루빨리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 바람이 하나 더 있다면 몇 명이 될지 모를 내 손주 녀석에게 나에 대한 기억들을 있는 그대로 전해줬으면 한다. 그 옛날 어머니께서 나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인자한 미소와 함께.


<메인사진 출처 : 경남 창원시 북면 수변 생태 공원, 아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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