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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y 10. 2022

스승의 은혜는 마늘 같아서

씹으면 씹을수록 씁쓸해지네

딸아이가 친구들과 시간을 맞춰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갈 거란다. 바야흐로 스승의 날 시즌이 돌아온 모양이다. 과거에 자신을 가르친 선생님들을 찾아뵙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긴 하지만 내겐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안타깝게도 내겐 초중고 12년 통틀어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없다. 이름과 얼굴 모두 또렷이 기억하지만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싶은 선생님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아니, 그보다 더 슬픈 것은 내 기억 속에 남은 선생님에 대한 이미지가 폭력, 차별, 편애와 같은 온갖 부정적인 단어밖에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보기에 거북하고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1978년 3월, 나는 형들이 다니던 곳과 다른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사상 최대의 베이비 붐 세대답게 아이들이 넘쳐났던 그 시절, 동네 아이들이 기존에 다니던 학교는 더 이상 학생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교육청에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학군을 일부 조정했고 그 결과 우리 동네 아이들은 높으신 분들의 자제들만 다닌다는 학교로 배정받았다. 부모님께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학교에 보내게 되었다고 기뻐하셨지만 그게 나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단지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자신의 자식들이 나쁜 물이 든다는 이유로 그 당시에도 우리 동네가 그 학군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이들의 인성과 자질보다는 부모의 재력이나 지위가 우선되고 봉투에 든 금액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일부 선생님들 속에서 나는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기에 내겐 국민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인생의 첫 선생님이었다. 첫 인연을 잘 만났어야 했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다. 내 기억 속 담임 선생님(이후 편의상 출쌤이라 부름)은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양반이었다. 그게 일상처럼 흔한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엄마들이 돌아가며 학교를 찾았고 그때마다 교실은 항상 누구네 엄마가 사 온 은은한 꽃향기로 가득 찼다.


그런 날이면 출쌤은 늘 기분이 좋아져서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숙제도 내지 않고 다른 반보다 이른 하교를 지시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꽃을 많이 사랑하시는 분이고 꼬마 자동차 붕붕처럼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분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친구의 입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들이 꽃병에 꽃을 꽂으며 선생님 책상 책꽂이에 돈봉투를 슬쩍 끼워 놓고 가신다는 사실을.


백번 천 번 양보해서 돈을 받는 행위 자체를 이해할 수는 있다. 더 나아가 돈봉투를 건넨 엄마의 아이를 편애하는 것까지도 참을 수는 있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학교에 돈봉투를 들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구박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출쌤은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아이들을 인간 이하 취급을 했다. 시험을 보고 성적이 잘 나와서 상장을 받을 때도 내겐 칭찬 한마디 없이 던지듯 상장을 건넨 반면 부잣집 아이들에겐 각종 학용품들을 두 손 가득 쥐어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것처럼 단상에 세워 놓고 박수를 강요하며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자연'이라는 과목의 수업시간 중 물체 주머니에서 '둥근 물체'를 꺼내라는 말에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동그랗게 생긴 조약돌을 꺼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병뚜껑을 들었지만 나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내가 꺼내 든 조약돌도 맞다고 생각했다. 분명 출쌤은 '둥근 물체'를 꺼내라고 했지 '원형 물체'를 꺼내라고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친구들이 꺼낸 것과 흡사한 병뚜껑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캡처)


'둥근'과 '동그란'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에서 고민했던 내 생각을 알아주리라는 기대는 검사와 동시에 무너졌다. 자리를 돌아다니며 부잣집 아이들 물건을 하나둘 짚어주며 판타스틱, 엘레강스, 엑설런트를 외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칭찬세례를 퍼붓던 출쌤은 이윽고 내 자리에 와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눈엔 이게 둥글게 보이나?"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 한마디와 동시에 출쌤은 '참 잘했어요.' 도장을 쥔 주먹을 내 얼굴에 날렸다. 겨우 1학년, 8살 아이에게 온 힘을 다 해 날린 주먹에 맞은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상처는 왼쪽 뺨에 선명하게 찍힌 도장의 흔적 '더욱 노력하세요'였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쌀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적게 담은 내 봉투를 들고 아이들 앞에 세워 망신을 주기도 했고 누군가 교실에서 오줌을 쌌을 때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확증 편향에 가까운 심증만으로 내 이름을 칠판에 큼지막하게 적어서 나를 범인으로 몰기도 했다.


그와 함께 한 1년은 말 그대로 내겐 악몽이었다. 돈의 힘, 뇌물의 위력이 그런 것인가를 알기에는 너무도 어린 8살 나이에 나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겪어야 했다. 누가 뭐래도 내 삐딱함의 시작은 그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학교 생활의 시작이 이러했으니 마침표만은 제대로 찍고 싶었지만 피날레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1989년 가을, 교지(교우지라고도 함) 편집부 활동을 하던 친구의 부탁을 받아 교지에 올릴 수필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고3 수험생이라는 부담감이 있긴 했지만 친구의 추천을 거절할 수 없어 흔쾌히 수락을 했었고 결과는 낙관적이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그 해 갓 부임했던 담당 선생님도 내 글을 읽으시고는 손댈 곳이 없을 정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당연히 교지에 올릴 거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기대는 졸업식날 받은 교지를 확인하고 또 한 번 무너졌다. 내 글이 올라와야 할 공간에는 눈에 익은 이름들이 들어 있었다. 학생회장, 합창 부장, 육성회장의 아들 등등 그 면면이 화려했다. 허탈한 마음에 졸업장을 받아 들고 교문을 나서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담당 선생님께선 애써 내 시선을 피하셨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갓 부임한 젊은 여선생님이 무슨 힘이 있을까. 윗선에서 입김이 작용한 게 분명했다. 이름 없는 학생의 글보다는 확실한 타이틀을 가진 학생의 글들이 필요했으리라.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싸구려 간판 하나 못 이기는 세상, 자신의 능력보다는 부모의 능력을 더 알아주는 곳이 세상이었다. 물론 내가 겪은 일부 나쁜 기억만으로 전체 교사를 판단하고 난도질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 어떤 직업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지만 나를 가르친 수많은 선생님들도 그러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다만,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은 몇몇 선생님들의 행태만은 도저히 이해도 용서도 안 된다. 칠판 앞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긴 장대를 아이들 목에 걸어 역도 하듯 들어 올리며 히죽히죽 웃던 인간, 엉덩이에 매질을 하며 왕년에 매 맞는 아이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있던 100 원짜리 동전이 때리는 몽둥이에 맞아 반쯤 접힌 적이 있다며 무용담(?)을 늘어놓던 인간, 두꺼운 30cm 자 모서리로 아이를 때려 머리가 찢어지게 만들어놓고는 피 묻은 자를 칠판지우개에 쓱쓱 닦으며 "개새X가 대가리는 약해 빠져 가지고" 라며 쌍욕을 퍼붓던 인간.

이런 인간들도 교사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깊은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제자들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불행히도 나는 학창 시절에 참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다수의 그저 그런 선생님과 몇몇 교사 나부랭이들 뿐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생사여부를 알 수 없지만 그 몇몇 교사 나부랭이들을 다시 만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왜 그러셨어요? 꼭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나요?"


덧) 이 글을 읽으실지도 모를 본문과 무관한 수많은 전현직 선생님들께는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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