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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27. 2023

고객님, 무전취식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만

“이리 오너냐옹~ 이리 오너냐옹~“


아침나절 해야 할 일을 거의 마무리하고 손님도 뜸해질 무렵, 가게 앞에서 애절하게 나를 찾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자주 오던 흰둥이의 소리가 아니었다. 전생에 고양이였는지는 몰라도 사람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안면 인식 장애 말기 증상을 보이는 내게 희한한 재주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고양이 울음소리를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만큼 몇 달을 주기로 터줏대감이 바뀌는 동네라 또 뉴페이스가 등장했음을 짐작했다.


서둘러 문 앞으로 가보니 귀티 나는 얼룩무늬 털과 도도한 표정을 가진 한 녀석이 가게 앞 벤치에 앉아 나를 향해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울어 젖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듣자 하니 이곳 뚱땡이 사장이 험악한 얼굴과는 달리 보기보다 인심이 후하다 하여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행여 남는 츄르라도 있으면 신세 좀 질까 합니다만……’


정확히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런 내용이었으리란 생각에 가게 안으로 돌아와 매대에 진열된 츄르 하나를 뜯어서 달려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녀석은 내가 밀어주는 속도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폭풍흡입을 했고 급기야 이빨로 포장지를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고양이 기준에서)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내 손가락마저 뜯어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얼른 새 츄르를 뜯어서 먹였다.


한 개, 두 개, 세 개로 이어질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녀석의 식탐은 담배를 사러 온 고객이 가게로 들어선 후에야 강제로 일시정지 되었다. 담배를 사면서 바깥을 슬쩍 쳐다본 고객은 밖에 있는 아이가 가게에서 키우는 고양이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오늘 처음 본 녀석이라 답했다. 슬며시 미소 지으며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짧은 인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보면 0.1톤의 거대한 몸뚱이로 쪼그려 앉아 자그마한 고양이에게 츄르를 먹이는 모습을 보고 '네 자식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밥을 떠먹여 준 적 있느냐?'는 레이저 눈빛을 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행인들의 시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이번 고객은 아름다운 미모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었다. 짧게 배웅인사를 하고 다시 하던 일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녀석의 울음소리가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깝게 들려왔다.


담배와 함께 몇 가지 상품을 고르고 결제하느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기에 당연히 그 사이에 어딘가로 갔으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카운터에서 일어나 보니 어느새 녀석이 매장 안에 들어와 연좌농성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두리번거리나 싶었던 녀석은 이내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갈라 쇼 하듯 혼자서 그 넓은 매장을 굴러 다녔다. 둘 중 하나였다. 사람 친화적 성격을 타고났거나 몹시 굶주렸거나.


매장 내부에 난입한 냥아취님

나머지 츄르를 들고 곁으로 다가가서 매장 안쪽으로 유인했다. 출입문 쪽에 있다가는 들어오는 고객이 놀랄 수도 있고 행여 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이 들어왔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 최대한 사람들의 동선과 떨어진 쪽에 자리를 잡고 뜯어놓은 츄르를 모두 먹였다. 그러고도 만족을 하지 못한 녀석의 먹성은 대단했다. 마치 츄르 무한 리필 맛집이라도 찾은 것처럼 지칠 줄 모르는 혀놀림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비장의 무기인 가다랑어 캔을 꺼냈다.


다년간 여러 묘객(猫客)을 접대한 경험 덕분인지 얼마 가지 않아 효과가 나타났다. 쉴 새 없이 먹긴 했지만 츄르를 먹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히 스피드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분 정도만에 캔을 깨끗이 비운 녀석은 기지개 한번 켜고 몇 번의 고양이 세수를 한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갔다.



고객님, 제가 사비 털어 선결제했으니 계좌이체 부탁드립니다. 쥐는 안 받습니다.


그날 얼룩이는 부가세 포함 7,400원 치를 드시고 가셨고 이후 두어 번 우리 가게 앞을 지나쳤다. 볼 때마다 반가운 마음에 츄르를 들고 유혹해 봤지만 어디선가 남다른 대접을 받은 후였는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은혜를 갚는답시고 어디서 쥐라도 물어 오면 어쩌나 걱정을 했던 내가 무안할 정도로 녀석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그 후로는 녀석을 보지 못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 살고 있으려니 생각하지만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 옛날 제 맘대로 나를 집사로 임명하고 내 다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단골 고객의 눈에 띄어 입양 갔던 깜보 녀석처럼 마음씨 좋은 사람 만나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이 글을 볼 리 만무하겠지만 아직도 녀석이 거리를 떠돌고 있는 거라면 텔레파시를 써서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친구들에게 맛집이라고 소문내고 다녀도 좋고 단체로 와서 내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좋으니 이 겨울 잘 버티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한번 우리 가게를 찾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저기...... 얼룩 선생님, 저희 가게에 따끈따끈한 신제품이 입고되었으니 시간 되실 때 찾아주십시오. 지인, 아니 지묘 동반 3묘까지는 가능하니 부담 갖지 마시고 근처 지나실 때 언제든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뚱땡이 사장이 시원하게 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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