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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un 16. 2022

어제는 사랑을, 오늘은 이별을?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사는 사람들

어제는 사랑을 오늘은 이별을 미소 짓는 얼굴로 울고 있었지
하지만 나 이렇게 슬프게 우는 건 내일이면 찾아올 그리움 때문일 거야


1990년대 초반, 발라드의 황제라 불리던 신승훈이란 가수가 있었다. 그의 수많은 히트곡 중 하나인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를 볼 때면 꼭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이 글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음주로 인한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분들을 만난다. 특히 나처럼 일반인들과 달리 밤늦게 출근해 늦은 아침까지 일하는 사람이 출근 직후 그런 분들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날이면 그날 하루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초면이거나 안면이 있다 해도 단순히 고객과 업주 그 이상의 관계가 아니기에 선을 넘었다 싶을 땐 경찰에 신고하는 등 단호하게 대처하지만 간혹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상가 인근의 사장님이나 종업원, 가게 인근 주거래 은행의 직원을 포함해 주변 사무실에서 일하는 회사원들처럼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 수년 정도 인연을 맺어 온 사람들이 난동을 부릴 때다. 


내게 그런 경험을 처음 안겨준 분은 옆 건물에서 식당을 경영하시는 사장님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10살 정도 많았음에도 항상 내게 존댓말을 쓰며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네시던 그 사장님은 주변 상가 사장님들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내릴 정도로 예의 바른 분이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더니 한순간에 그분을 무법자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알코올이었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흥분이 최고조에 달한 그 사장님은 동행한 친구분이 온 힘을 다해 말려도 역부족일 만큼 무서운 괴력을 발휘하셨다. 의자를 발로 차고 테이블을 뒤집어엎는 등 당장 경찰을 불러야 할 상황이었지만 뻔히 아는 처지에 그렇게 매정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친구분과 함께 힘을 합쳐 완력으로 제압했다. 


불가항력인 상황이라 힘으로 마무리를 짓긴 했지만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려 밤새 꺼림칙한 기분으로 보내고 다음날 아침을 맞았는데 하필 해 뜨고 처음 맞은 손님이 문제의 그 사장님이었다. 혹시 어젯밤 그 일을 따지기 위해 오셨나 싶은 생각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그 사장님은 언제나 그랬듯 밝게 웃으며 밤새 일하느라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건네 오셨다. 


보통 이런 경우엔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셔서 폐를 끼쳤노라고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한데 단 몇 시간 만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웃는 사람을 붙잡고 '어제 했던 짓 기억 안 나? CCTV라도 돌려서 보여드릴까?'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대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경험은 우리 가게를 자주 찾으며 안면을 익힌 호텔 주방 조리사를 통해서였다. 이 분도 역시 술이 문제였다. 평소에는 새색시처럼 말도 조곤조곤, 행동도 다소곳하던 분이었는데 술이 들어가니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계산하는 손님에게 주먹으로 툭툭 치며 시비를 걸고 여성 고객에게 전화번호를 달라며 생떼를 쓰는 등 선을 넘는 행동에 참다못한 손님 한 분이 경찰을 불렀다.


난동은 경찰이 출동하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민중의 지팡이가 선량한 사람을 때린다는 둥 과잉 대응으로 고소를 할 테니 법정에서 보자는 둥 거의 자해공갈에 가까운 행패에 결국 경찰이 수갑을 채워 연행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경찰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아침, 훈방조치를 받고 풀려난 그 손님은 가게에 찾아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한 마리 야수처럼 종횡무진 가게 내부를 휩쓸던 패기는 온 데 간데 없이 평소 모습 그대로 굽신굽신, 나긋나긋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내 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 동생~~"으로 시작하는 동요 <내 동생>의 마지막 가사처럼 어떤 게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외에도 정도가 심하지 않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비슷한 일을 겪은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입에 걸레를 물고 있는 듯 밖에 나와서는 말끝마다 욕설을 내뱉던 은행 직원이 다음날 아침 업무차 방문한 내게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깍듯이 인사를 하는 모습에 당황한 적도 있었고 전날 밤 친구들과 라면을 먹으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낄낄거리던 사람이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언제 그랬냐는 듯 온몸에 예의를 휘감고 나타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한 번씩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되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바닥으로 뚝 떨어지고 그 충격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만큼이나 크다. 그렇다고 이런 얘기들을 어디 가서 속 시원히 할 수도 없다. 심지어 아내에게조차 비밀로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아내와 나, 두 사람 모두 가게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 서로를 배려하느라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아내와 얘기를 할 때면 분명 동일 인물임에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뉠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아내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면 당장이라도 실상을 공개하고 싶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고 넘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처럼 내 눈에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아내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비록 지금은 굳게 밀봉되어 있지만 훗날 이 일을 그만두고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되면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인지 궁금하다. 분명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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