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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Feb 01. 2023

엄서칩은 엄서요(없어요)

줄임말을 쓰는 사람들의 심리란......

갑통알, 갓생, 깔미, 무물, 반모, 빠태, 사바사, 스불재, 애빼시, 일취월장, 캘박, 핑프, 혼코노, #G

위에 언급된 줄임말 중 그 뜻을 모두 아는 이는 과연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다.(정답은 맨 아래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줄임말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아가고 있는 현실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금이라도 길다 싶은 글이 있으면 특별한 이유 없이 일단 줄이고 보는 무분별한 사용도 꼴 보기 싫지만 그걸 젊음과 늙음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내 속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다.


얼마 전 제 아비가 얼마나 늙었나 테스트하기 위해 딸아이가 비교적 오래된 신조어인 '갑분싸'라는 말의 뜻을 물어본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 찾기도 힘든 그 단어를 끄집어낸 것이 괘씸해 배우 황정민 씨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말했던 것처럼 '갑자기 분뇨를 싸지른다.'라고 대답했더니 딸아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를 골방 노인네 바라보듯 했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많이 먹어봤자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여성 고객이 들어와서는 대뜸 '엄서칩'을 찾았다. 처음에는 포카칩이나 스윙칩, 썬칩처럼 스낵의 한 종류가 새로 출시되었나 싶어 아직 우리 점포에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어느 회사에서 제조된 것인지 물어봤다. 그 고객은 대뜸 창원시에서 만들지 어디에서 만들겠냐는 말과 함께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그 고객이 말하는 것이 '음식물 쓰레기 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고객들이 '음식물 칩'또는 '쓰레기 칩'이라고 하는데 그 고객은 왜 되지도 않는 발음을 구사하는 수고까지 하며 '엄서칩'을 찾았던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고객의 표정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젊어서 아는데 너는 늙어서 모른다'는 듯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 표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 담배를 살 때 자주 짓는 표정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에체(에쎄 체인지), 말레(말보로 레드), 아블(아이스 블라스트), 프블(레종 프랜치 블랙)등 새 담배가 출시될 때마다 일단 두 음절로 줄이고 보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걸 못 알아들을 때마다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곤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손님을 가르치려 들 수도 없고 내가 늙어 보인다고 괄시하는 거냐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니, 아줌마. 말을 줄이려거든 발음이라도 똑바로 하시든가요. 그 옛날 노래방에서 마법의 성얼 지나 넢얼 건너던 어떤 선배랑 저 덜에 푸러런 솔잎얼 보라던 전직 대통령 이후 아줌마처럼 발음하는 사람 처음 봅니다. 엄서칩이 뭡니까? 음쓰칩이라면 몰라도. 지금 오리지널 경상도 티 내시는 겁니까?'라며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콜센터 직원을 능가하는 목소리 톤과 친절한 사장님 모드를 장착하여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에 버금가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잘 들리지도 않고 해서 제대로 못 알아들었네요. 음식물 쓰레기 칩 말씀하시는 거죠? 몇 리터 짜리 필요하신가요?"




손님이 나간 후 자리에 앉아 사람들이 왜 줄임말을 쓰는가 생각해 봤다. 말할 때 한 글자라도 줄여서 에너지와 체력을 아끼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일까 봐? 아무 생각 없이 버릇처럼? 남들이 하니까 그냥? 풀네임으로 부르기 귀찮아서?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이제 늙은이 대열에 들어선 나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백번 천 번 양보해서 젊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까지는 그나마 봐줄 수 있다. 그게 그들만의 문화이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한 차례 유행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게 젊음과 늙음을 구분하는 기준이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상대적으로 나이 든 사람들이 젊어 보이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에도 단호하게 반대한다.


지난 주 늦은 밤에 확실히 50대 중반은 넘긴 듯한 중년의 남성 둘이 캔맥주를 사면서 안주로 '오징어 땅콩'이란 과자를 구매한 적이 있다. 우연히 듣게 된 두 분의 대화 중에서 맥주 안주에는 '오징어 땅콩'이 최고라는 한 분의 말씀에 친구분께서 '오징어 땅콩'이라 부르면 늙은이 취급당한다며 '오땅'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친구의 말을 들은 그분께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하셨다. 

"돈 주고 사서 내 입에 쳐 넣으믄 그만이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하노? 젊은것들이 오땅이라 부르든 말든 잘 모르겠고 나는 고마 오징어 땅콩 할란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뭔 지랄들이고. "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나는 그때 그분께서 하셨던 말씀이 정답이라 생각한다.



갑통알 : 갑자기 통장을 보니 알바를 해야 할 듯
갓생 : '신'이라는 의미의 God과 인생을 합친 말로 생산적이고 계획적인 삶을 사는 인생
깔미 : 깔수록 미운 사람
무물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반모 : 반말 모드의 줄임말로 상대방과 서로 말을 놓고 싶을 때 "반모?"라고 쓰임.
빠태 : 빠른 태세 전환
사바사 :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아류작으로 '사람 바이 사람'의 줄임말로 사람마다 다르다는 뜻
스불재 : 스스로 불러온 재앙
애빼시 : 애교 빼면 시체
일취월장 : 일요일에 취하면 월요일에 장난 아니다
캘박 : '캘린더에 박제한다'의 줄임말로 일정을 달력에 기록 또는 저장한다는 뜻
#G : 샵지>시압지>시아버지
핑프 : 핑거 프린스(또는 프린세스)의 줄임말로 손가락 까딱해서 검색하는 것마저 귀찮아 질문만 하는 사람
혼코노 : 혼자서 코인 노래방에 간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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