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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17. 2021

3년 같았던 3일, 나는 비가 싫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침부터 비가 오네요."

"네? 비가 온다고요?"

매일 오시는 옆 건물 헬스장 사장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우산꽂이를 앞뒤 출입구에 두고, 들어오는 손님이 행여나 미끄러운 바닥에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객의 동선을 따라 공간 여기저기에 우천 매트와 종이박스를 깔았다. 예전부터 유독 비 내리는 날을 싫어했지만 내가 비를 더더욱 혐오하게 된 것은 오래전 있었던 작은 사고 때문이었다.


봄비라고 하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폭우가 내렸던 날이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우산꽂이를 이용하지만 간혹 문 앞에 놓인 우산 꽂이를 애써 외면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잠깐 다녀가는 것이니 우산을 꽂았다가 빼는 그 과정이 번거로울 수도 있고 자칫 분실의 위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문제는 그날처럼 폭우가 내릴 때다. 우산을 정해진 장소에 두지 않고 들고 다니면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 때문에 바닥이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다는 점이다.


사고는 항상 여러 악조건이 겹칠 때 일어난다. 그날도 그랬다. 우산을 들고 카운터로 온 고객들이 잠깐 사이 몰아친 후 바닥 곳곳에 물이 흥건한 것을 본 나는 어서 바닥을 닦아야겠다는 생각에 걸레를 가지러 백 룸으로 향했다. 잠시 카운터를 비운 그 짧은 순간,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어떤 여성분이 카운터를 향해 뛰어오다가 물기 가득한 바닥에 그대로 미끄러진 것이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그 고객에게 달려가 부축해서 자리에 앉히려는데 바닥이 민무늬인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날씨에 그런 걸 신고 미끄러운 바닥을 뛰어다니면 어떡하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오는 걸 억누르고 우선 상태부터 살피며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당신 눈에는 지금 이게 괜찮아 보이냐는 잔뜩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나 이거 그냥은 못 넘어가요. 손해배상 청구할 거예요. 여기 보험 처리되죠?"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고객은 대뜸 보험 처리 여부부터 물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최대한 고객의 편에 서서 설명해드렸다. 과정이 복잡할 수도 있지만 가능한 걸로 알고 있다는 말과 함께 밤이 늦었으니 응급실이라도 가는 게 어떻겠냐고,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진료비를 청구하면 확인 즉시 보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한마디에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고객은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긴 후 내가 불러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전화를 걸어 몸상태는 어떤지 물으며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억지로 참지 말고 어서 병원에 가시라고 했다. 그 고객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비용 처리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지난밤에 했던 말을 똑같이 할 수 없어 본사 직원에게 확인해본 후 좀 더 상세히 알려드리겠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비용 걱정 말고 병원에 가시라고 말씀드렸다.


또 하루가 지났지만 고객으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그 전날 문의한 내용에 대한 답변도 해야 하고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서 기다리다 못해 다시 전화를 하니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쉬는 중이라며 병원에 가더라도 본사에서 가입한 보험으로 처리할 것이고 내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본사 직원을 통해 들은 대로 보험사에서 나와 조사를 진행하게 되면 고객 과실 여부까지 따질 수도 있으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이 진료비에 대한 부담 갖지 말고 병원에 다녀오시라 수차례 말했지만 그 고객은 끝까지 확답을 하지 않았다.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론이 나야 해결 방법을 찾을 텐데 아무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이 되자 고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거동에 무리는 없어서 병원에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본의 아니게 며칠 동안 괴롭힌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함께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차도가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언제든 병원에 가시고 연락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사고가 일어났던 날부터 내리 3일 동안 마음고생한 것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함께 마음고생한 아내에게도 결과를 알려주었더니 해결이 잘 돼서 다행이라 했다. 그 며칠 동안 아내 또한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많이 한 터였다.


며칠 후 본사 직원이 방문해서 문제의 장면을 CCTV로 확인한 후 결과만 놓고 보면 명백한 고객의 잘못인데도 잘잘못 따지지 않고 대응을 잘했다는 말을 했다. 내 생각에도 사고 발생 후 맨 처음 말했던 그 한마디가 결과를 좌우했다고 본다. 만약 그때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고객이 잘못한 부분을 따지고 들었더라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을 것이다.


몇 년 전 비 내리는 날 카페 주차장에서 고객이 차에서 내리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사고가 생각났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인데 업주와 고객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걸 보고 마음이 불편했다. 업주 입장에서야 당연히 억울할 법한 일이었지만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첫 대응을 잘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 순간만 보지 말고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지혜를 가졌으면 더 나은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비가 싫다. 고객들이 불편을 겪지 않게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 많아서 싫고 들어오던 고객이 미끄러져 다치는 사고가 또다시 재발할까 걱정이 되어 싫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평상시보다 고객 수가 감소해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시간이 길어져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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