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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24. 2022

세상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다

최강 진상과 무능한 공무원의 콜라보

장사를 하다 보면 블랙 컨슈머, 이른바 진상 고객을 만날 때가 있다. 거의 대부분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에 간단히 사과를 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때가 많고 제품에 하자가 있거나 표기된 유통기한 이전에 변질된 상품일 경우 제조업체에서 보상을 진행하기도 한다.


지난 20여 년간 수많은 진상 고객을 만났지만 2018년에 있었던 그 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 사건 중 하나다. 살다 살다 그렇게 허술하면서도 집요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 일로 인해 거의 6개월 가까운 시간 마음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찾아가서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사건의 발단은 김밥 한 줄에서 비롯되었다. 말을 할 때마다 일관성 없이 횡설수설 달라지긴 했지만 그 고객이 마지막으로 한 주장에 따르면 내가 유통기한이 3일이나 지난 김밥을 팔았고 본인이 그걸 먹은 후 두드러기가 발생해서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일을 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황당한 주장이었다. 오래전부터 편의점 업계에선 유통기한을 둘러싼 이슈 방지 차원에서 상품 고유 바코드에 유통기한과 생산 일시 정보를 추가한 '타임 바코드 시스템'을 도입했고 이것이 적용된 상품은 유통기한을 단 1초만 넘겨도 판매 등록 자체가 불가능한데 3일이나 지난 상품을 구매했다는 주장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 완벽한 허위사실이었다. (아래 동영상 참고)


동일한 상품을 유통기한 내에 스캐닝했을 때와 유통기한이 1초 지난 후 스캐닝한 영상


시스템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고 구매했다는 문제의 그 상품은 입고 당일 다 팔린 게 확인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본사 고객의 소리, 관련 관공서, 심지어 국민 신문고에까지 글을 올리고 수시로 가게에 전화를 걸어 폭언과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별다른 이의제기가 없을 시 과태료 처분 및 영업 정지가 될 거라는 구청의 공문이 날아든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쓸 판이었다. 서울에 있는 본사 전산실에 연락해 당일 판매 데이터를 출력해서 받고 그 사람 주장의 모순점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체크하는 한 편 구청 위생과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타임 바코드에 대한 설명과 함께 3자 대면을 요구했다. 


시간이 흘러 3자 대면을 약속한 날, 본사 직원과 함께 구청을 찾았다. 약속했던 시간이 지났지만 클레임을 제기한 당사자는 끝내 오지 않았고 한참 후 나타난 담당 공무원은 특유의 고압적인 자세와 함께 다짜고짜 자신이 보기엔 민원인의 말이 더 신뢰가 간다고 말했다.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야 할 공무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봤다.


"증거가 확실하잖아. 이렇게 명백한 증거 사진을 보고도 계속 우길 겁니까?"

책상 위에 던지듯 내놓은 것은 두드러기가 났다는 팔뚝 사진, 약봉지 서너 개를 찍은 사진, 그리고 문제의 3일이 지났다는 김밥 포장지 사진이었다. 의심을 하자면 끝이 없을 만큼 허술한 사진 몇 장을 두고 명백한 증거라고 하니 기가 찰 따름이었다.


우리가 제출한 증거 자료는 확인했는지, 다른 편의점에 가서 타임 바코드 시스템에 대한 실사를 진행했는지 여부를 물었지만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하지 않았다는 답과 함께 그 공무원은 전산 자료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미 한쪽으로 철저하게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고객의 주장이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다시 한번 설명했다.


시종일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담당 공무원은 내 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조만간 과태료 처분을 할 테니 억울하면 소송을 걸어 판사를 설득하든지 알아서 하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뒤돌아서는 공무원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주사님은 스스로 실사 확인 안 했다고 말씀하셨고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 드셨습니다. 저희 본사 전산 자료는 조작되었을 거라는 말씀도 하셨고..... 맞죠? 지금까지 있었던 대화 내용 다 녹취했습니다. 억울하면 소송 걸라고 하셨죠? 조만간 주사님과 구청 위생과를 상대로 소송 걸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한차례 쏘아붙이고 일어서려는데 위생과장이란 사람이 황급히 달려와 나를 붙잡으며 내부적으로 좀 더 논의한 후에 결과를 통보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같은 말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어처구니없었지만 민원을 제기한 사람의 주장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반박했다. 위생과장은 잘 알겠다는 말과 함께 부하 직원의 일처리 방식에 대해 사과했다.


그 후 몇 달의 시간이 지났지만 보내겠다는 과태료 통지서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는 우편물도 받지 못했다.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 민원인에게 새로운 증거 제출을 요구했는지도 알 수 없고 그 공무원이 그 후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내부 논의 끝에 흐지부지하게 결론 낸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그간의 진행과정을 전해 들은 주변 상가 사람들은 처벌을 피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며 그런 일이 발생하면 길게 끌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소비자 앞에서는 항상 '을'의 입장이 되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 그리고 그 틈을 노리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살고 싶은지 묻고 싶다. 지은 죄도 없이 처벌을 받을 뻔했던 상황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에 대해서는 지금도 강한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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