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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Nov 01. 2021

자유, 그거 달콤한 것만은 아니더라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인 게 2000년 4월 1일이었다. 모든 것이 생동감 있게 느껴지고 화사함으로 가득한 봄기운에 맞춰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시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배우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살던 곳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내 고향 대구는 그랬다. 누군가는 분지 특유의 지형 때문에 조금은 폐쇄적이고 한번 정한 것을 쉽게 바꾸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했고 또 누군가는 그걸 보수적인 성향이라 칭하기도 했다. 새롭게 자리 잡은 이곳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남도 특유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사람들끼리 쉽게 친해지는 대신 그만큼 상대방에게 무례하다 느껴질 만큼 부담스럽게 친근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처음엔 이게 같은 나라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 자연스레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다.


단 하나, 앞날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제외하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다행히 같이 일하는 애들도 궁합이 잘 맞는 편이었고 모시는 사장님 내외도 내가 편히 적응할 수 있게 물심양면 도와주셨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도 태어나 처음으로 맞는 자유를 한껏 만끽했다. 어지럽게 술병이 나뒹굴 정도로 술을 마셔도, 방바닥에 드러누워 줄담배를 피워도 누구 하나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게 바로 천국이 아닌가 싶었다.



"형, 그거 알아요? 독립해서 혼자 사는 거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그 자유로움 반년 넘기기 힘들거든요. 우스갯소리로 하는 자취생들의 발전 단계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즐기다가 무료함이 느껴질 즈음 소설이나 만화책을 빌려요. 그다음 단계가 TV와 비디오테이프, 그다음이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최종적으로 뭔가 빠져들만한 취미생활을 찾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취업을 한 후배 녀석의 방에 몇 년 전 놀러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그 해 8월쯤이었다. 의욕이 넘치던 초심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점점 사람이 피폐해져 감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퇴근길에 영양실조로 집 앞에서 쓰러지기도 했고 또 한 번은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잘못 먹어서 식중독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조바심에서 일어난 무리한 일상생활의 습관들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내 가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월급의 90%를 적금에 붓고 나머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통신비, 월세 등을 해결하려다 보니 자연 식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이 가게에서 나오는 폐기 상품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것이었다. 가끔 그마저도 없으면 아예 굶는 날도 많았으니 몸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과 향수병이었다. 학창 시절 모든 인연의 중심에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두터운 인맥을 자랑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그 많은 인연들을 끊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할 일이 없어 홀로 방안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전화기 속에 저장된 이름을 하나둘 넘기며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았지만 마땅한 사람 찾기가 너무 힘들었고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어도 선뜻 통화 버튼 누르는 게 망설여졌다.


실패자라는 자격지심과 패배자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은 채 살아가는 내가 굳이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내 아픔과 상처를 나눠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그 사람들이 과연 내 전화를 기분 좋게 받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혼자만의 세상에 가두고 있었다. 


홀로서기를 마음먹었으니 어떻게 해서든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만 했고 여기서 포기하고 밀리면 더 끝장이라는 생각에 몇 번이나 각오를 새롭게 다졌지만 그와는 반대로 내 병은 더더욱 깊어져 갔다.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선 쉽게 나아지지 않을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나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 노력의 시작점은 '사람'이었다.



난 패배자입니다만..... 승격, 그거 인생 걸고 합니다.

얼마 전 웬만한 축구팬이라 해도 거의 알지 못하는 어느 축구 선수의 인터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K리그 2 대전 하나 시티즌 소속의 마사(본명 : 이시다 마사토시)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마사 선수는 한때 유망주로 이름을 날리며 일본 프로축구 J리그 교토 상가 FC에 입단을 하지만 그 후 별다른 활약을 못하다가 여기저기 저니맨처럼 떠돌다가 K리그 2 안산 그리너스에 자리를 잡는다. 말도 통하지 않고 통역사도 따로 없는 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어 공부와 한국 축구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던 그는 그런 노력의 결과로 일정 시간 출전 기회를 보장받고 많은 골을 기록하며 새롭게 이적한 K리그 2 수원 FC가 1부 리그로 승격하는데 공을 세운다. 이를 발판으로 올 시즌 1부 리그 강원 FC에 입단을 하지만 부상과 함께 부진을 겪게 되어 다시 임대 계약으로 대전 하나 시티즌 유니폼을 입는다. 굴곡 있는 축구 인생을 살면서도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위해 사력을 다 해 뛰던 중 지난 10월 10일 프로 데뷔 후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그 경기 수훈 선수로 선정이 된다. 

그날 인터뷰에서 마사 선수는 "승격을 원하는 팬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리포터의 질문에 비록 조금 더듬거리긴 했지만 한국어로 자신 있게 그런 말을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축구 인생에서 패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매 경기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경기가 있고..... 어쨌든 승격, 그거 인생 걸고 합니다."


그 인터뷰를 보는 내내 고향을 떠나 처음 이곳에 발을 딛고 고생을 하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패배자'라는 단어와 '인생을 건다'는 그 표현이 얼마나 가슴에 와닿던지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국적을 떠나 마사 선수가 선수로서 목표하는 바를 꼭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목표다운 목표를 이루진 못했지만 남은 인생을 걸고 지금까지 버티며 사는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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