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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13. 2021

J가 내게 준 작은 선물

그녀는 나에게 산소 호흡기를 달아주었다.

50년 넘게 살면서 머릿속에 저장된 수많은 기억들 중에서 유독 강렬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약국이나 동네 슈퍼에서 판매하는 박카스 병을 볼 때면 국민학교 운동회 때 어머니가 사주셨던 그 맛이 입에서 맴돌기도 하고 공원에서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모습을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연을 만들던 그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내 주변을 스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또 하나의 기억이   가을에 있었다.



J는 나보다 두 살 어린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오전 시간을 이용해 4시간씩 파트 타이머로 근무를 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해 쉽게 말을 붙이기 힘든 성격이었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지독한 향수병과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며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인연들마저 애써 외면하다 보니 사고무친(四顧無親)이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철저히 혼자인 상태였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돈을 모아서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는 거창한 꿈은 어느새 사라졌고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수준의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J였다.


"점장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요즘 안색이...... 부쩍 말수도 줄어든 것 같고."

"그냥 좀 그러네요. 내가 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점장님 가을 타시나 보다. 어디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올래요? 고향이 대구라고 하셨죠? 바다 쪽이 괜찮으려나?"

"광안리나 해운대 같은 사람 많이 모이는 바다라면 사양하렵니다."


"저도 그런 바다는 싫어요. 제가 내일 엄마 차 가지고 올 테니깐 같이 드라이브 가요. 점장님은 지금 기분 전환이 필요한 거 같아."



다음날 J는 전날 말했던 대로 어머니 차를 몰고 나타났다. 아무런 의욕도 없던 나는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 출발을 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차는 어느새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통행하는 차량이 줄어들고 좁은 2차선 도로에 진입해서 오르막길을 오르는가 싶을 무렵 눈앞에 펼쳐진 풍경, 드넓은 바다였다.


순간 몸속에 막혀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감정에 휩싸인 채 물끄러미 바다만 바라보았다.


"여기 너무 좋지 않아요? 회사에서 가끔 회식하러 왔었는데 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해서.... 제가 진짜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점장님도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여기 꼭 데려오세요. 좀 더 가다 보면 알려지지 않은 맛집도 꽤 있거든요."


물건을 사고 남는 돈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산 복권이 당첨된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별생각 없이 따라왔다가 기대 이상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 점심은 인근의 횟집에서 해결을 했다. 없는 돈 털어서라도 먹고 싶다는 것이 있으면 다 사주고 싶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차창을 내렸다. 늦은 오후의 따뜻한 가을 햇살, 시원하게 얼굴을 스쳐 지나는 바닷바람,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 전주가 흘러나왔다. 너무 행복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잠시 주변도 돌아보며 살았어야 했는데 왜 나는 앞만 보고 달렸을까?' 

'그래, 가는 길이 조금 더디더라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자. 그게 원래 내 스타일 아닌가.'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는 거란 생각에 왜 그리 급하게 서둘렀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J는 공무원 시험에 집중하겠다며 일을 그만뒀다. 마지막 근무를 하는 날, 나는 그녀에게 내가 시험에서 겪었던 실패 과정을 들려주며 그동안 준비해왔던 각종 수험자료와 정리 노트를 넘겨주었다. 진심으로 그녀가 합격하길 빌었다.


뭔가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  사진 출처 : 본인 블로그
산 정상에서 바라본 저도 연육교 & 일명 콰이강의 다리    사진 출처 : 본인 블로그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때 그곳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 개발이 되어 예전의 조용하고 한적했던 분위기는 많이 사라졌지만 바다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해 봄에는 어머니 생신을 맞아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점심식사도 하고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다시 오라던 J의 말을 뒤늦게나마 지킨 셈이었다.


휴대폰 속에 저장된 노래를 랜덤으로 듣다 보면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이 나올 때가 있다. 그 노래 전주가 시작되면 나는 지금도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동작 그만, 일시 정지 상태가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되돌아간 착각에 빠지곤 한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때 내 얼굴을 비추던 가을 햇살이 느껴지고 내 뺨을 어루만지던 바닷바람이 주변을 감싸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항상 J의 얼굴이 배경화면처럼 떠오른다. 그녀는 다 죽어가던 내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준 은인이었다. 그때 그녀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년이면 오십 줄에 접어들 J는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짧은 인연이었지만 나를 기억하고는 있을지 궁금하다. 우연히라도 만나게 된다면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꼭 말해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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