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이런 친구 하나쯤은 있잖아요
출근하기 전 세수를 하다가 코피를 쏟았다. 흘린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쏟았다. 어릴 적 친구랑 공놀이를 하다가 축구공에 정통으로 맞아 찔끔 흘린 이후 오십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숫대야 한가득 피로 물들이고도 쉽게 멈추지 않는 심각한 상태였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면 아내와 딸이 걱정할까 욕실에서 나오면서도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아무렇지 않게 출근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단순한 피로 누적일까? 뭔가 몸에 심상치 않은 병이 생긴 것은 아닐까? 일을 하면서도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밤을 새워 12시간을 일하는 것은 여전히 내게 힘든 일이다. 정해진 일들을 순서대로 하다 보면 6~7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그렇게 아침을 맞으면 출근길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게 보내지만 틈틈이 찾아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고독을 잊으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도 해보고 드라마나 영화도 보지만 좀처럼 집중하기가 힘이 든다.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거라 그러던데 나는 그 수준까지 이르진 못했나 보다.
하루 일과를 거의 끝내고 한숨을 돌리며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잠깐의 여유를 가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오OO 님께서 보내신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선물인가 확인할 틈도 없이 카카오톡 메시지가 이어졌다.
친구야~! 잘 지내지?
파란 하늘도 울긋불긋한 단풍도 이쁜 요즘이네.
살기 바빠서 선뜻 만나러 가기는 어렵지만,
친구랑 따신 밥 한 그릇 먹고 싶은 마음을 담아 보낸다
이 쌀이 맛있다네~!
잘 먹고 잘 살자 우리~!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흔히 받는 커피나 아이스크림, 빵 같은 기프티콘이었다면 그런 감정까지 들지는 않았을 거다. '밥 한 그릇 같이 먹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쌀이라니 그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어도, 늘 신경 써주시는 부모님이 계셔도 메워지지 않던 부분이 친구의 짧은 글로 한 번에 채워진 느낌을 받았다. 비록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활자체의 짧은 글이었지만 내 눈엔 친구 특유의 가녀린 손글씨가 자연스레 그려졌다. 그동안 존재마저 잊고 있었던 오랜 친구 오 여사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오여사는 30년 지기 여사친이다. 쌀쌀함이 채 가시지 않은 1990년 이른 봄날 같은 동아리에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왔으니 알고 지낸 것은 정확히 32년째가 된다. 남중, 남고, 공대의 모태솔로행 막강 특급열차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만만찮은 테크트리를 탄 나로서는 오여사가 인생 최초의 ‘아는 여자’였다. 게다가 초중고 친구들과 모두 연락이 끊긴 현재, 오여사는 내 인생 최장수 친구이기도 하다.
한때 커플로 오해받을 만큼 오여사와 나는 함께 한 추억이 많다. 과외하던 학생이 내가 살던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주말에 가끔씩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신 적도 있고 내가 오여사네 이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에서 오랜 기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동기들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했던 오여사를 위해 후배들을 동원해 축가팀을 만들어 예식장에 가기도 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누구보다 먼저 장례식장을 찾았으니 말 그대로 희로애락을 함께한 친구인 셈이다. 그렇게 붙어 다니면 한 번쯤 이성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하늘에 맹세코 우리는 친구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여사와 함께 밥을 먹은 곳 중에서 <이수락>이란 상호를 사용하는 식당이 있었다. 사전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창작을 한 단어 같은데 당시 사장님 말씀으로는 그 뜻이 '남다른 대접을 받아 기쁜'이라 했다. 나는 그날 아침, 친구로부터 감히 흉내내기 힘들 정도의 남다른 대접을 받았다.
일찍이 공자님께선 논어에서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비록 자주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 사는 친구지만 이렇게 마음이라도 찾아주니 그 또한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제 시간 내서 밥이나 한 번 먹자."는 말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때가 많다. 그게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든 형식적인 인사였든 간에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자주 잊고 산다. 나 또한 그랬던 적이 많다. 지나고 보니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시간들이 많이 후회스럽다. 더 늦기 전에 그녀와 따뜻한 밥 한 끼를 해야겠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향이 진한 커피도 덤으로.
학창 시절 그녀는 최용준의 '목요일은 비'라는 노래를 좋아했었다. 확률은 희박하지만 어느 비 오는 목요일이 오면 그 노래를 불러줘야겠다. 지금은 베란다 구석에서 장식품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낡은 기타와 함께.
그녀의 갑작스러운 선물로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우리 둘 모두 볼 품 없는 몸매에 머리도 희끗희끗한 중년의 모습이겠지만 다시 만나면 나이 따위 잊고 곧바로 철부지 20대 그 당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따라 아침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마치 강렬하지만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 5월의 햇살처럼.
5월의 봄햇살처럼 따뜻한 미소를 가진 그녀가 있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여러분들도 이런 친구 하나쯤은 있으시죠?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