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면
오랜만에 외식을 한 후 아내와 근처 카페를 찾았다. 두 사람 모두 늘 똑같은 커피를 마셨기에 굳이 메뉴판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날 그 카페의 메뉴판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닮았다. 글씨체가 너무 닮아 있었다. 표지를 보는 순간 숨이 멎을 듯했다.
정화는 한 살 어린 동아리 후배였다. 국어교육과 전공자답게 글쓰기를 좋아했고 편지 쓰기를 즐겼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통신 환경 속에서 당시 두 달이 넘는 방학기간은 생이별의 기간이었다. 간혹 집전화로 통화를 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아르바이트, 학원 수강 등 개인 사정으로 인해 연락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였다.
우리는 그 빈자리를 편지로 메웠다. 평소에도 서로의 학과 사무실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놓고 가기도 했고 방학만 되면 서로 경쟁하듯 소식을 전하곤 했다. 정화는 내게 처음으로 '오빠'라는 호칭을 썼다. 단지 성씨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장난스럽게 시작된 오빠, 동생의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친남매처럼 가까워졌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나는 군대에 가야 했고 제대 후 복학해서 학교 생활에 적응할 즈음 정화는 졸업과 함께 취업을 했다. 각자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후 우리는 예전의 그런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정화에게는 그 무렵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생겼고 그 사람에 대한 예의상으로라도 연락을 피했다.
그 후 정화를 만난 것은 두 번이었다. 대학 졸업식 후 찾아주는 이 하나 없이 쓸쓸히 시내를 방황할 때 근무를 끝내고 나를 축하해주러 나왔던 것이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어느 해 11월의 일이었다. 다음 해 봄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그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해를 넘긴 그 해 초 정화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열병을 앓는다. 50년 넘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대학 시절, 매년 11월이면 우리 동아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공연을 했다.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합숙에 가까운 연습을 하며 서로에게 할 말 못 할 말 다 해가면서 지지고 볶던 과정들은 여름의 무더위와 가을의 단풍을 거쳐 11월의 뒹구는 낙엽들과 함께 결실을 맺었었다. 그때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지금 이맘때다.
오래전 유튜브에서 우리와 닮은꼴 같던 어느 동아리의 30주년 공연을 본 적이 있다. 후배들이 마련한 그 공간에서 예전에 활동했던 많은 선배들의 활동 당시 사진과 명단을 보여주는데 간간히 띄는 이름 앞의 고(故)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분들 모두 그 공간에 같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년 11월 공연을 함께 준비하던 사람들 중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제법 많다. 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싶은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나이를 먹고 웬만한 감정들에는 무감각해지는 내성이 생겼는데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누군가의 부고(訃告)다.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을 하곤 했지만 과연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다.
11월은 내게 아픔의 달이다. 졸업식 날 환하게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어 준 정화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도 11월이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을 먼저 보낸 것도 11월에 많이 몰려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 사람 마음을 시리도록 아프게 하려고 매년 공연 날마다 그렇게 추웠던 건지.
오늘은 오랜만에 그때 함께 불렀던 <여행스케치>의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이란 노래를 들어봐야겠다. 그리고 영원히 기억은 하되 상처는 조금씩 지워나가야겠다. 노래 가사처럼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세월 가면 잊혀지려나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