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아니라, 세상에서 잠시 잊힌 기분이다.
늘 알람 소리에 심장이 툭 떨어지며 깨어나던 버릇 때문인지, 퀭한 눈이 절로 떠졌다. "늦었다!"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려다, 이내 침대 끝에 걸린 겨울 햇살을 보고 깨달았다. 아, 나 오늘 쉬지. 8시간은 회사의 이름으로, 4시간은 합격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12시간을 남의 속도에 맞춰 달리던 발동기가 비로소 멈춘 것이다.
이불 밖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방바닥의 온기가 너무나 다정해서 울컥했다. 늘 구두 속에서 퉁퉁 부어있던 발바닥이, 보일러가 도는 장판에 닿자마자 "고생했다"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부엌으로 가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파란 불꽃이 올라오며 집안의 시린 공기를 데우는 소리. 늘 출근길 편의점에서 허겁지겁 마시던 캔커피 대신, 찬장 깊숙이 아껴두었던 찻잎을 꺼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얼굴을 감싸는데,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동안 참 많이도 깎아 먹으며 살았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알던 모습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12시간 동안 완벽한 부속품이 되려고 애쓰느라, 짓물러 터진 마음의 연한 살들을 반창고 하나 없이 방치해 둔 내가 너무 미안해서 자꾸만 얼굴을 만져보았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3일이겠지만, 12시간의 소음 속에 갇혀 살던 나에게는 이 고요함이 마치 기적 같았다.
점심엔 남은 밥에 계란 하나를 정성껏 부쳐 올렸다. 늘 학원 계단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서서 먹던 끼니가 아니라, 나를 위해 차린 소박한 식탁. 숟가락을 들려다 문득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바삐 움직이는 차들이 보였다. 저 안에도 어제의 나처럼 12시간의 굴레를 견디는 누군가가 있겠지. 그들을 응원하고 싶으면서도,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찰나의 평화가 너무 애틋해서 자꾸만 밥이 목에 걸렸다.
오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은 거실 구석에 뒤집어 놓았다. 대신 빨래를 돌렸다. 8시간의 땀과 4시간의 불안이 밴 셔츠가 비눗물 속에서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며 느꼈던 차갑고도 맑은 겨울바람. 그 바람이 내 마음의 생채기들도 함께 말려주는 것 같았다.
오늘은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도, 누군가의 기대를 채워야 한다는 긴장도 없다. 그저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그동안 버텨준 나에게 "정말 애썼다"라고, "너 참 대견하다"라고 마음껏 말해주고 싶은 오후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어쩌면 12시간의 폭풍을 견디고 돌아와, 자기 자신의 연한 살을 가만히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비로소 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