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30분. 창가에 머물던 햇살이 자취를 감추자 방 안엔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평소 같으면 직장에서 녹초가 된 채 학원으로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하루 종일 집 안의 온기를 머금은 몸은 한결 가벼웠고, 마음엔 적당한 탄력이 생겨 있었다. 뒤집어 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돌려세우며 생각했다. '자, 이제 남은 4시간의 괄호를 열 차례인가.'
오후 6시. 요양보호사 학원 강의실의 철문을 밀고 들어섰다. 평소엔 지독하게 무겁던 그 문이 오늘은 웬일인지 순순히 열린다. 강의실 안은 여전히 하얀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했고, 그 아래엔 저마다의 고단함을 짊어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퇴근 후 바로 달려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돋보기를 고쳐 쓰는 동료들. 그들의 지친 어깨를 보니, 오늘 하루 온전히 쉬고 온 나의 시간이 미안하면서도 참으로 귀하게 느껴졌다.
"기저귀 교체 시 주의사항은..."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평소엔 쏟아지는 잠을 쫓느라 글자가 춤을 추곤 했는데, 오늘은 문장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노후를 돌보는 법을 배우는 이 시간이, 오늘은 타인이 아닌 '나의 미래'를 돌보는 정성처럼 느껴졌다.
8시 40분쯤 되었을까, 꽉 쥐고 있던 연필심이 '톡' 하고 부러졌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각자의 절실함 속에 갇혀 있었다. 평소라면 그 정적이 숨 막히는 고립처럼 느껴졌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리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동질감이 마음을 스쳤다. 나는 부러진 연필 대신 새 연필을 꺼내 쥐며, 낮에 나에게 해주었던 그 말을 동료들에게도 마음속으로 건넸다. 다들 참 애쓰고 있다고.
밤 10시 10분. 학원 문을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힌다. 8시간의 직장 업무가 없었던 오늘, 평소라면 가벼운 운동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야 할 길 위에서 나는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저 멀리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전광판에 깜빡이며 다가온다. 저 차를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나의 작은 요새, 따뜻한 장판과 낮에 널어둔 빨래 향기가 기다리는 나의 집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그 익숙한 안온함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가 싫었다. 현관문을 열고 불을 켜는 순간, 이 꿈같은 휴가도 결국 '현실'이라는 틀 안에 갇혀 마침표를 찍게 될 것만 같아서.
정류장을 지나쳐 무작정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금 가면 안 될 것 같아. 조금만 더 이 밤의 바깥에 머물고 싶어."
어디라도 좋았다. 집으로 향하는 정해진 이정표만 아니라면. 불 꺼진 상점들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회사원도, 요양보호사 수험생도 아닌, 그저 길을 잃고 싶은 작은 점 하나였다. 8시간의 생존과 4시간의 희망을 덜어낸 자리에 남은 것은, 나조차도 몰랐던 낯선 그리움이었다.
밤 11시가 넘어가는 도심의 끝자락.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목적지를 향해 바삐 움직이지만, 나는 목적지가 없는 이 방황이 너무나 소중해서 자꾸만 발걸음을 늦췄다.
나에게는 아직 내일이라는 휴가가 더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나는 집이 아닌 낯선 골목의 벤치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코끝이 찡해질 만큼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고마웠다. 이 시린 감각만이 내가 지금 온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결국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잠이 들어야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삶의 궤도에서 아주 멀리 이탈해 있고 싶다. 나를 기다리는 따뜻한 방바닥보다, 나를 모르는 이 낯선 밤의 품이 훨씬 더 뭉클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