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는 병 : 마감 없는 밤의 삽질

by 뽀송드림 김은비

밤 11시 50분. 아까 그 폼 잡던 감성적인 방랑자는 어디 가고, 집구석 소파에 널브러진 '기록 중독자'만 남았다.

분명 몸은 천근만근인데 뇌는 이상하게 말랑거린다. 이게 문제다. 남들은 휴가면 머리를 비운다는데, 글 쓰는 인간들은 이 틈을 타서 평소보다 더 치열하게 머릿속에 쓰레기를 수집한다.


"아, 아까 그 학원 문 열 때 느낌... '순순히 열렸다'는 좀 평범한가?"


냉장고에서 차가운 캔맥주 하나를 꺼내며 혼잣말을 뱉는다. 남들이 보면 영락없는 혼잣말 빌런이겠지만, 나에겐 이게 가장 치열한 문장 고르기다. 아까 길바닥 벤치에서 코끝 찡하게 청승 떨던 것도 결국은 다 '글감'으로 써먹으려는 본능적인 수작이었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작가는 참 비겁하고도 부지런한 짐승이다. 자기 고생까지 다 팔아먹으려 드니까.


노트북을 켤까 하다가 관둔다. 괜히 거창하게 판 깔면 문장이 굳어버릴 게 뻔하다. 대신 굴러다니는 영수증 뒷면에다 휘갈겨본다.


요양보호사 학원의 형광등은 지나치게 정직하다.


부러진 연필심은 내일의 나를 미리 부러뜨려 본 연습이다.


써놓고 보니 좀 오글거리는데, 또 이게 밤의 맛이다. 낮에는 절대로 못 내뱉을 말들을 수집하며 혼자 낄낄대는 시간. 남들에게는 8시간의 노동 뒤에 찾아오는 휴식이겠지만, 나에게 이 새벽은 '진짜 나'로 복귀해서 벌이는 야간 잔업에 가깝다. 보너스도 없고 퇴근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 잔업이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다.


캔맥주가 바닥을 보일 때쯤, 창밖엔 이제 지나가는 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내일 아침이면 '내가 미쳤지, 이걸 왜 썼어' 하며 이 영수증을 쓰레기통에 처박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적어도 이 새벽만큼은 내가 내 삶의 편집장이고, 주인공이고, 유일한 독자니까.


자, 이제 이 짓거리도 적당히 하고 잠들 시간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쓸데없는 생각들이 나를 찾아오겠지. 그게 작가의 저주이자, 축복인 걸 어쩌겠나.


"내일은 진짜 아무것도 안 써야지."


물론 이건 매일 밤 나 자신에게 하는 가장 흔한 거짓말이다.


[ 괄호를 닫으며 : 영수증 뒷면에 남긴 마지막 문장들 ]


오전 10시 30분. 알람 없는 아침은 축복이라기보다 당황에 가깝다. 햇살이 침대 위를 점령하고 나서야 느릿하게 눈을 떴다. 머리맡엔 어젯밤 맥주 캔과 함께 뒹굴던 영수증 쪼가리들이 어지럽다. '작가라는 병' 운운하며 적어 내려간 글자들을 읽어보니 가관이다. 하지만 이게 진짜 내 얼굴이지 싶어 헛웃음이 난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 한 모금을 들이켜며 영수증들을 순서대로 맞춰 보았다. 나의 72시간, 그 괄호 속에 던져졌던 날것의 파편들이다.


영수증 뒷면의 기록들


첫 장 (편의점 4,500원): "휴가 첫날. 직장 상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막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8시간을 내다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8시간 동안 나를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둘째 장 (카페 5,100원): "학원 강의실의 돋보기안경들. 그 너머의 눈동자들은 나보다 훨씬 반짝였다. 늙어가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중인 사람들. 그 틈에서 나는 비로소 가짜 고독을 멈췄다."


셋째 장 (무인 카페 2,500원): "밤 12시 벤치. 발가락 끝이 시려오는데 정신은 명료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무서웠던 건, 현관문이 내 자유의 유통기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황도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마흔 살의 새벽."


[ 괄호를 닫는 법 ]

오후 3시. 휴가의 끝자락은 늘 미지근하다. 빨래 건조대에서 잘 마른 수건들을 걷어 차곡차곡 갠다. 낮에 널어두었던 햇살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어제 새벽엔 그렇게나 돌아오기 싫던 이 집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요새 같다. 역시 인간은 간사하고, 작가는 더 간사하다.


이제 곧 괄호를 닫아야 할 시간이다. 12시간의 생존과 4시간의 희망, 그리고 이름 없던 나머지 시간들. 이 괄호를 닫는다고 해서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쏟아지는 업무 메일과 씨름하고, 저녁엔 꾸벅꾸벅 졸며 기저귀 가는 법을 외우겠지.


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게 있다. 영수증 뒷면에 휘갈긴 이 보잘것없는 문장들이 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냥 버려질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이 시린 밤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증거물들이다.


"자, 이제 다시 현실로 복귀할 시간."


노트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괄호를 닫는다. [ ]. 닫힌 괄호는 매듭이 아니라 저장이다. 이 안에 담긴 온기를 꺼내 먹으며, 나는 또 다음번 괄호를 열 수 있는 날까지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휴가는 끝났지만, 기록은 남았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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