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는 병 : 괄호 밖의 출근길

by 뽀송드림 김은비

오전 8시 20분. 다시 열린 현실의 괄호

어제 오후 3시, 분명 "현실로 복귀할 시간"이라며 비장하게 괄호를 닫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그 괄호가 다시 벌어졌다. 출근길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밖을 본다. 주머니 속에는 어제 차곡차곡 접어 넣어두었던 '영수증 쪼가리'가 만져진다.


"다시 시작이네."


어제 새벽, 내가 내 삶의 편집장이라며 호기롭게 맥주 캔을 따던 그 방랑자는 지금 어디 가고 없을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편집장이 아니라, 밀린 업무 메일과 오늘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평범한 '월급쟁이 1'일 뿐이다. 어제 적은 문장들이 꿈결처럼 아득해진다.


오후 1시 15분. 식당 앞 줄 서기

식당 앞, 대기 번호표를 받았다. 그런데 이 종이 질감이 묘하게 익숙하다. 어젯밤 내 감성을 받아내던 그 영수증과 똑같은 감열지다. 남들은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데, 나는 이 대기 번호표 뒷면의 하얀 여백을 보자마자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작가라는 병'이 도진 거다.


[ 대기 번호 14번 ] 앞선 13팀의 허기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일. 밥을 먹는다는 건, 오전 내내 깎여나간 영혼의 높이를 다시 채우는 작업이다.


주머니에서 모나미 볼펜을 꺼내 번호표 뒷면에 한 줄을 쓱 긋는다. 현실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또다시 일상의 파편을 훔쳐 문장으로 만들고 있다. 결국 괄호를 닫는다는 건 끝이 아니라, 다시 열기 위한 잠시 동안의 '저장'이었던 셈이다.


오후 4시 40분. 쏟아지는 업무와 '기저귀' 사이

모니터엔 엑셀 창이 가득하고, 머릿속엔 어제 외운 요양보호사 실습 내용이 둥둥 떠다닌다. '기저귀를 갈 때는 와상 환자의 심리적 위축을 고려해야 한다...' 업무 보고서를 쓰면서도 자꾸만 어제 그 강의실의 '정직한 형광등'이 생각난다.


현실의 나(회사원)와 밤의 나(기록자), 그리고 내일의 나(예비 요양보호사)가 좁은 머릿속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싸운다. 이 충돌이 피곤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이 혼란이 나를 살게 한다. 아무 기록도 하지 않는 평온한 삶보다, 부러진 연필심처럼 아슬아슬하게 나를 깎아내며 한 줄이라도 남기는 이 삶이 더 '나'답기 때문이다.


괄호 속의 또 다른 괄호: 퇴근과 등교 사이


오후 6시 10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인파 속에서 나는 홀로 역주행을 시작한다. 다른 이들의 목적지가 '집'이라는 안식처일 때, 나의 목적지는 노란색 간판이 선명한 'OO요양보호사 교육원'이다.


불편한 구두와 노란색 교과서

지하철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꽉 끼던 구두 뒤축을 고쳐 신는다. 회사원이라는 허물을 벗어던질 새도 없이 강의실 문을 열면, 그곳엔 이미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다.


"보라 씨, 오늘도 안 늦었네! 여기 사탕 하나 먹어."


앞자리에 앉은 왕언니뻘 수강생이 건네는 박하사탕 하나. 낮 동안 사무실에서 "김신입 씨, 이것 좀 다시 해와요"라는 말에 잔뜩 굽혔던 내 등이, 이곳에서 불리는 '보라 씨'라는 다정한 호명에 비로소 꼿꼿하게 펴진다. 엑셀 수식과 상사의 눈치로 가득했던 머릿속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장기요양보험제도'와 '체위 변경'이라는 생소하지만 정직한 단어들을 채워 넣는다.


휠체어 위의 철학

오늘의 실습은 휠체어 이동 돕기다. 불편한 슬랙스 무릎이 툭 튀어나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동료 수강생이 앉은 휠체어 앞에 무릎을 굽힌다.


"선생님, 이제 내려갑니다. 조금 흔들릴 수 있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지탱하고 이동시킨다는 것. 회사에서 기계적으로 치던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라는 메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감이 내 손바닥과 등줄기에 전해진다. 휠체어 바퀴를 고정하는 '딸깍' 소리가 마치 내 불안한 일상을 단단히 고정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강사님이 외친다. "환자의 눈높이를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 말에 허리를 더 숙여 상대를 바라본다. 누군가의 눈을 이토록 정면으로 오래 바라본 적이 언제였던가. 숫자와 서류가 아닌, 사람의 표정과 숨소리에 집중하는 이 시간이 묘하게 나를 정화한다. 낮 동안의 감정 노동이 '기술적 돌봄'의 노동으로 치유받는 역설적인 순간이다.


잉크가 번진 기저귀 실습 종이


강의가 끝나갈 무렵, 나누어 준 유인물 귀퉁이에 나도 모르게 또 문장을 적고 있다.


'기저귀를 채우는 것은 수치심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은 인간의 존엄을 감싸 안는 일이다.'


옆자리 짝꿍이 묻는다. "보라 씨, 뭐 그렇게 열심히 적어? 시험에 나오는 거야?"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답한다. "아뇨, 그냥 잊어버리기 아까운 게 있어서요."


밤 9시 50분. 학원 건물을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온다.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어깨엔 피로가 곰처럼 매달려 있지만, 가방 속엔 낮의 영수증과 밤의 실습지가 뒤섞여 묵직하다.


이 '삼중생활'이 나를 깎아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깎여 나간 연필심이 지나간 자리마다 선명한 흑연의 궤적이 남듯, 나의 하루도 비로소 진해지고 있다.


밤 11시 50분. 다시 돌아온 나의 시간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씻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어제와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 주머니를 비우니 오늘 하루의 수확물들이 쏟아진다. 점심때 썼던 대기 번호표, 버스 환승하며 챙긴 영수증, 그리고 탕비실에서 주워온 메모지.


어제 "내일은 진짜 아무것도 안 써야지"라고 했던 거짓말이 기분 좋게 나를 배신한다. 나는 다시 노트북을 켜는 대신, 오늘 모은 이 종이 쪼가리들을 어제 닫았던 괄호 옆에 나란히 놓아본다.


[ ]. [ ].


닫혔던 괄호들이 기차 칸처럼 연결되며 나의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 이게 맞다. 매듭짓지 못한 채 계속되는 이 '삽질'이 나의 삶을 지탱하는 진짜 보너스다.


"자, 오늘의 영수증은 뭐라고 말하고 있나."


캔맥주를 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시 '야간 잔업'을 시작한다. 퇴근은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나만의 야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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