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59분. 현실과 환상 사이의 도어락
맥주 캔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넣는다. 알싸한 탄산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오늘 하루의 피로와 문장의 흥분을 동시에 씻어 내린다. 노트북의 오른쪽 하단 시계가 '00:00'을 향해 숫자를 바꾼다.
이제는 정말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한 문장을 더 보태 '내일의 나'를 파괴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오늘의 나'를 보존할 것인가.
주머니에서 꺼내 놓았던 종이 쪼가리들을 가만히 쓸어 모은다. 점심때의 그 번호표도, 퇴근길의 영수증도 이제는 충분히 제 몫을 다했다. 이것들은 이제 문장이 되어 내 머릿속에 안착했다.
오전 12시 00분. 완벽한 매듭
"자, 여기까지."
스스로에게 내리는 퇴근 명령이다. 작가라는 병이 아무리 깊어도, 결국 그 병을 앓기 위한 '몸'이 있어야 글도 있는 법이니까. 요양보호사 실습 때 배운 대로, 내 마음도 너무 무리하지 않게 잘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노트북 화면을 툭 닫는다. 까만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은 편집장도, 예비 요양보호사도 아닌, 그저 조금 졸린 눈을 한 퇴근 자다.
오늘 하루, 괄호 밖으로 삐져나온 마음들을 수습하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는 문장이 아니라 잠 속으로 침잠할 시간.
[ ]
비어있는 괄호 하나를 마음속에 그려 넣는다. 내일 아침, 저 괄호 안에 어떤 출근길의 풍경이 담길지 기대하며 불을 끈다.
잘 자요, 오늘의 기록자.
[괄호 밖의 외출 : 출근과 퇴근, 그 사이의 삽질]
오전 7시 30분. 어제 새벽의 감성은 간데없고 퉁퉁 부은 눈의 생활인만 남았다. 집 앞 정류장, 멍하니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번호판이 보이면 습관적으로 몸을 싣고 창가 구석에 처박힌다. 지하철처럼 매끄럽지 않은 시내버스의 덜컹거림은 잠을 깨우기보다 오히려 어제의 피로를 골고루 섞어놓는 기분이다.
창문에 이마를 대면 차가운 유리가 머릿속 열을 식혀준다. 길가에 서서 바쁘게 걷는 사람들, 신호를 기다리는 배달 오토바이들. 저마다의 속도로 흐르는 풍경을 보며 나는 다시 비겁한 작가 모드를 켠다. '저 배달 기사의 헬멧 뒤엔 어떤 표정이 숨어 있을까?' 같은, 돈 안 되는 생각들을 하며 회사로 향한다.
오전 10시 : 마침표를 빼앗긴 문장들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엔 서류 뭉치가 산더미다. 내 글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목숨을 걸지만, 여기선 그저 '상사의 입맛'이 곧 문법이다.
"김신입 씨, 이 문구 좀 너무 감성적이지 않아? 그냥 팩트 위주로 쳐내."
공들여 고른 형용사가 빨간 줄 한 줄에 잘려 나간다. 내 마음의 괄호는 여전히 열려 있는데, 회사는 자꾸만 내 생각에 강제로 마침표를 찍으라 한다. 속으로 '당신이 새벽의 영수증 뒷맛을 알아?'라고 쏘아붙이고는, 입으로는 "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라며 영혼 없는 자판을 두드린다. 이게 내 밥줄이고, 이 밥줄이 있어야 밤에 맥주 한 캔을 딸 '자격'이 생긴다는 걸 알기에 참는 거다.
오후 5시 30분 : 시곗바늘의 유혹
퇴근 30분 전. 이때부터 마음은 이미 버스 정류장을 지나 학원 강의실로 달려간다. 오늘은 '노인성 질환' 파트를 배우는 날이다.
마지막 보고서를 전송하고 가방을 챙기는데, 옆자리 동료가 묻는다. "김신입 씨, 오늘 끝나고 치맥 어때?" 순간 흔들린다. 차가운 맥주 거품과 쓸데없는 농담들. 하지만 내 가방 속엔 어제 보던 요양보호사 교재가 묵직하게 들어있다.
"미안, 나 학원 가야 돼." "와, 독하다 독해. 퇴근하고 또 공부를 해?"
독한 게 아니라 살려고 가는 거다. 회사에서 소모된 나를 다시 채우기 위해, 혹은 언젠가 이 괄호를 완전히 닫고 작가로만 살 수 있는 날을 꿈꾸며 나는 다시 버스에 오른다.
오후 6시 : 다시, 형광등 아래의 안식
회사 근처에서 학원으로 가는 버스는 유독 사람이 많다. 꽉 낀 사람들 틈에서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며 생각한다. 낮의 내가 '타인의 문장'을 교정하는 편집자였다면, 지금의 나는 '나의 내일'을 예습하는 학생이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낮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나를 반긴다. 화려한 직함도, 성과 지표도 없는 곳. 그저 '어르신들 편하게 모시는 법'을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 틈에 섞여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회사에서의 8시간이 나를 소모하는 시간이었다면, 학원에서의 4시간은 나를 다시 조립하는 시간이다."
강의실의 하얀 형광등이 유독 정직하게 빛난다. 이제 펜을 든다. 이번엔 서류 수정용이 아니라, 내 삶의 여백을 채울 진짜 공부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