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20분. "보라 씨,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여? 이거 좀 먹고 해요."
학원 입구에서 출결 카드를 찍고, 휴대폰 앱까지 켜서 이중으로 '보라'라는 존재를 증명한다.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짝꿍,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시는 언니가 미리 챙겨 온 떡볶이 그릇을 내민다.
"보라 씨,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여? 이거 먹고 기운 내."
여기선 낮 동안의 치열한 직함들은 잠시 잊힌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이지만 내 사업장을 운영하는 1인 사업자이고, 지금은 방학 중인 사회복지학부 3학년이자, 밤이면 문장을 짓는 작가인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엉덩이를 붙인 예비 요양보호사일 뿐이다.
매콤한 양념이 입안에 퍼지는데, 이상하게 자꾸 목이 메어온다. 단순히 맛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다 놓아버릴까’ 고민하던 찰나에 누군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며 건넨 붉은 온기. 그 사소한 다정함이 무너져가던 내 마음의 둑을 간신히 지탱해 준다.
오후 8시 30분. 3학년의 책상 위에 미리 핀 논문
강의실의 하얀 형광등 아래, 강사님의 요양보호 이론 설명이 이어진다. 나는 이제 겨우 학부 3학년 과정을 시작하는 학생이지만, 머릿속은 이미 졸업 너머 대학원의 시간대를 걷고 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조용히 기획해 온 프로그램들이 요양보호 실습 내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억지로 쥐어짜지 않아도 내가 가야 할 취업처의 풍경이, 그리고 먼 훗날 쓰게 될 논문의 주제가 선명한 고화질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그냥' 그려지는 것이다. 아랫배가 쿵 내려앉을 만큼 답답해지는 현실 속에서도, 내 영혼은 이미 다음 단계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이 지독한 기록자의 본능, 혹은 작가라는 병.
오후 10시 10분. 엇갈린 서류, 멈출 수 없는 관성
수업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데, 낮에 확인한 학교 측의 연락이 다시금 머릿속을 헤집는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분명 순서대로 서류를 보냈다. 신입사원이자 사업자로서 내 삶을 증명하는 사업자등록증명과 산업체 위탁 계약서를 먼저 제출해 내 자리를 공고히 다졌고, 그다음 정말 쉼이 간절해 휴학 서류를 던졌었다.
숨쉬기 벅찰 만큼 몰아치는 일상에서 잠시 도망치고 싶어 낸 마지막 패였다. 그런데 세상의 시스템은 내 쉼표만 쏙 빼놓고 작동한다. 앞서 보낸 증빙 서류들은 다 처리되었는데, 정작 내 숨구멍이었던 휴학 서류만 처리가 안 되었다니.
"언니, 세상이 참 웃겨요. 공부하겠다는 서류는 덥석 받으면서, 좀 쉬겠다는 서류는 모른 척하네요."
옆자리 언니에게 툭 내뱉은 말에 뼈가 섞인다. 학교 행정실의 실수인지, 아니면 작가이자 사회복지사로서 멈추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전히 '보라 씨'로 불리며 이 수많은 정체성을 짊어지고 계속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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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의 괄호는 조금 붉다. 떡볶이의 양념 같기도 하고, 열정인지 독기인지 모를 내 마음의 색깔 같기도 하다. 휴학 서류가 누락된 채 붕 떠버린 내 상황을 생각하며, 노트북 대신 어제 먹다 남은 맥주 캔을 잡는다.
"괜찮아, 보라야. 떡볶이 먹고 힘냈으니까 내일은 행정실이랑 한판 붙든, 아니면 그냥 이대로 논문까지 달려보든 하는 거지."
따뜻한 우유 한 잔 마시고 잘 자요. 굿 나잇~
수많은 명함을 가슴에 품고도 '나'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든 보라 씨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