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누락된 삶을 읽는 법

by 뽀송드림 김은비

단잠의 끝을 거칠게 자르고 들어오는 오전 7시의 알람 소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무례하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보며 이 피로의 질감을 가늠한다. 수채화보다는 짙은 먹조각에 가깝다. 몸은 침대 속으로 가라앉는데 머릿속은 벌써 오늘의 첫 문장을 고른다. 화장실 거울 속, 까칠해진 내 얼굴을 보며 "전형적인 고뇌하는 주인공의 상이네"라며 싱거운 농담을 던진다.


선물 받은 설화수 스킨을 손바닥에 덜어 얼굴을 두드린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을 따라 고마운 그 사람의 다정한 얼굴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그 온기가 채 가시기 전, 손가락 끝에는 어제 밤새 눌러 외웠던 요양 이론의 문장들이 마치 지장처럼 꾹꾹 되새겨진다. 소중한 이의 마음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머릿속으론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삶. 이 따뜻하고도 치열한 괴리가 오늘을 살아갈 나의 정직한 온기일지도 모르겠다. 셔츠 단추를 채우며 사원증과 학생증,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작가의 펜을 챙겨 넣는다. 현관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겁지만, 오늘 마주칠 세상이 어떤 문장이 되어줄지 은근한 기대를 품는 것, 이게 바로 이 병의 초기 증상이다.


오전 8시 20분,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앞서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읽는다. 바쁘게 발을 옮기는 저들은 각자 어떤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는 걸까. 멀리서 들어오는 버스의 번호를 확인하며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줄에 몸을 싣는다. '만원 버스'라는 좁은 틈새에 끼어 창밖을 내다보면, 덜컹이는 진동과 함께 타인들의 어깨너머로 도시의 풍경이 흐른다. 이 좁고 흔들리는 공간 안에 나 또한 섞여 있다는 안도감과 이질감이 기묘한 잉크가 되어 차오른다.


9시 정각, 사무실 조명이 일제히 켜지며 전투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컴퓨터 부팅 소리와 함께 '신입 씨'라는 부름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전화벨 소리와 복사기 돌아가는 소음 사이에서 나는 철저히 톱니바퀴가 된다. 하지만 한창 업무에 몰입하던 10시쯤, 탕비실 구석에서 식어버린 보리차를 들이키며 받은 전화 한 통이 기계적 일상에 균열을 낸다. "죄송합니다, 처리가 안 됐네요." 학교 행정실 직원의 무심한 목소리. 내가 밤새 입술을 깨물며 제출했던 휴학 신청서가 누군가의 모니터 위에서는 그저 클릭 한 번 누락된 데이터 조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허망함이 차가운 액체가 되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공부하겠다는 서류는 빛의 속도로 덥석 받더니, 잠시 숨 좀 고르겠다는 서류는 모른 척 발을 뺀다. 세상은 나를 '보라'라는 고유명사로 읽어주기보다, 쉼 없이 굴러가야 하는 부속품으로 보길 원하는 게 분명하다. 신입사원, 사업장 주인, 사회복지학부생, 예비 요양보호사. 내 어깨 위 겹겹이 쌓인 이름표들이 일제히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쉴 수 있을 것 같았어? 넌 아직 더 걸어야 해."


오후 3시 20분, 점심시간의 짧은 휴식 끝에 다시 쏟아지는 업무 서류들을 넘기다 문득 손가락이 멈춘다. 분명 회사 서류인데, 이상하게 어제 학원 강의실에서 들었던 요양 이론들이 그 행간 사이로 툭툭 튀어나와 겹쳐진다. 머릿속으론 '다 놓아버리고 싶다'를 외치는데, 무의식은 이미 나중에 쓸 논문 목차를 메모장 구석에 끄적이고 있다. 이쯤 되면 이건 단순한 성실함이 아니라, 뼛속까지 새겨진 지독한 '기록자의 본능'이 아닐까. 현실의 발목은 진흙탕에 빠져 있는데, 영혼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서 다음 장에 쓸 근사한 문장을 고르고 있으니 말이다.


6시 퇴근 알람이 울리지만, 나의 하루는 이제 막 2막으로 접어든다. 사무실을 나서면 차가운 저녁 공기가 뺨을 때리고, 다시 몸을 실은 버스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빼곡히 적힌 전시장 같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스마트폰 빛에 반사된 멍한 눈동자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문장을 적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우주인데, 여기선 그저 밀려나는 점 하나구나.’ 옆 사람의 통화 너머로 들리는 사소한 고충조차 내 메모장의 한 줄이 된다. 퇴근길 버스의 소음은 나에게 배경음악이고, 그 소음 끝에 도착한 곳은 학원 강의실이다.


오후 8시 30분, 이번엔 두꺼운 요양보호 교과서를 편다. "어르신들의 심리 변화는..." 강사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릴 때, 낮동안 모니터 위에서 차가운 수치와 그래프로만 존재하던 현장의 목소리들이 밤의 이론과 만나 비로소 입체적인 온기를 입는다. 졸음이 쏟아지지만 책장 귀퉁이에 낙서를 남긴다. '오늘 보고서 속 데이터로만 존재했던 누군가의 완고한 요청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어쩌면 사회로부터 잊히지 않으려는 마지막 안간힘이었을지도.'딱딱한 서류와 전화 너머의 음성마저 결국 글감이 된다는 사실이 나를 씁쓸하게 웃게 하지만, 그 묘한 본능이 무너져가는 내 마음의 둑을 간신히 지탱해 준다. '이것도 다 쓸 데가 있을 거야'라는 작가다운 자기 위안이 다시금 펜을 쥐게 한다.


밤 11시 30분, 다시 켜진 스탠드 불빛 아래서 결국 휴학 서류를 다시 만지작거리다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 어쩌면 이 누락이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삶의 고약한 조언일지도 모른다는 뻔뻔한 생각을 해본다. 어제 옆자리 언니가 건넨 떡볶이의 매콤한 여운처럼, 내 삶도 참 맵고 뜨겁다. 하지만 그 매운맛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 보라야. 쉼표가 누락됐으면 느낌표라도 찍으며 가야지 어쩌겠어."


거창한 다짐은 아니다. 그저 내일 아침 다시 '신입 씨'로 불리며 세상 밖으로 나갈 때, 조금 더 근사하게 웃어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다. 수많은 정체성 사이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이 지독한 병을 앓으면서라도 끝까지 내 삶을 기록해 나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오늘 밤, 내 마음의 이야기는 끝맺음 없이 흐른다. 그 속에 눈물을 담을지, 아니면 다시 달릴 연료를 담을지는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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