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지에서 느꼈던 팽팽한 긴장이 채 가시기도 전, 오늘은 청천동 지사라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새벽 공기를 가른다. 요양보호사 평일반 교육을 마친 덕분에 이제는 거리가 조금 멀어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사 일이 잠시 주춤해 쉬고 있던 나에게 찾아온 이 기회는, 마치 2월의 찬 바람 끝에 예고 없이 찾아온 선물처럼 소중하고 반갑다.
출근을 준비하며 식탁 위에 소지품을 하나둘 늘어놓고 나만의 '출근 의식'을 치른다. 나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줄 에코백 속에는 오늘 하루를 촘촘히 기록할 다이어리와 볼펜, 그리고 배터리 걱정 없는 하루를 위해 보조 배터리가 자리를 잡는다. 낯선 곳에서 나를 증명해 줄 신분증과 체크카드가 담긴 작은 동전 지갑도 챙기고, 마스크 속에서 바짝바짝 마를 입술을 위해 립 케어도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성스레 챙긴 것은 봉지 가득 담긴 계피 사탕이다. 단순히 기분을 전환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직 목감기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목안이 까칠하고 건조하기 때문이다. 따끔거리는 목을 따뜻하게 데워줄 알싸한 계피 향은 단순히 맛을 넘어, 오늘 하루 내 목소리를 지켜줄 든든한 보디가드와도 같다. 사탕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비로소 실감이 난다. 나는 오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간다.
거창한 식사보다는 가벼운 한 끼가 당기는 아침이다. 주말에는 요양원 실습을 병행하며 체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터라, 속이 편안하면서도 에너지를 채워줄 바나나 한 개와 두유 한 컵을 식탁에 올린다. 노란 바나나 껍질을 까며 오늘 마주할 새로운 풍경들을 상상해 본다.
"엄마, 오늘 청천동 처음 가는 거지? 길 잃어버리지 말고 잘 다녀와!"
장난스럽게 건네는 아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처음 가는 길이라 노선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버스 창밖으로 흐르는 낯선 풍경들은 생경하면서도 활기차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분 좋은 무게만큼, 나는 오늘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일들을 배우게 될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드디어 도착한 청천동 지사. 문을 여는 순간, 낯선 사무실의 공기가 훅 끼쳐온다. 처음 뵙는 분들께 정중하면서도 밝게 인사를 건네고 업무를 익히기 시작한다. 주말 실습을 통해 어르신들을 세심하게 살폈던 현장 감각 덕분일까, 처음 온 곳임에도 업무를 파악하는 눈길이 제법 매서워졌음을 느낀다.
지사 분들은 거리가 먼데도 흔쾌히 여기까지 와주어 고맙다며 따뜻하게 나를 맞아준다. "오늘부터 잘 부탁드려요!"라는 나의 말에 건네오는 그들의 다정한 미소 덕분에 긴장됐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중간중간 목이 따끔거릴 때마다 입안에 넣은 계피 사탕의 온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비록 아직 요양보호사로 정식 취업한 것은 아니지만, 평일엔 이곳에서 성실히 일하고 주말엔 어르신들을 살피는 나의 일상이 톱니바퀴처럼 활기차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다.
업무를 익히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엔 중요한 숙제가 남아 있다. 바로 야간대학 수강신청이다. 어느덧 나도 대학 3학년이 되었다. 고학번의 무게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신입생처럼 뜨겁다. 학교에 전화를 걸어보니, 삼월 삼일 오전 열 시에 정확히 시스템이 열린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다이어리를 펼쳐 그 시간을 큼지막하게 적어 넣는다. 수강신청은 마치 전쟁터의 티켓팅과 같아서 벌써부터 손끝이 떨리지만, 전공 지식을 더 깊이 쌓을 수 있다는 기쁨이 그 긴장을 압도한다.
삼월은 나에게 참으로 특별하고 치열한 달이 될 것 같다. 3학년으로서 맞이하는 첫 수강신청도 있고, 무엇보다 삼월 말에는 대망의 요양보호사 필기시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실습생으로 현장을 익히고, 평일 낮에는 청천동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며 틈틈이 시험 문제집을 넘겨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내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꽃샘추위가 지나고 삼월 말, 당당히 합격 소식을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벚꽃 길을 걸을 나를 상상해 본다. 오늘의 이 서툰 첫걸음과 목을 달래주던 계피 사탕의 알싸한 맛은, 훗날 가장 달콤한 성취감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에코백을 고쳐 메며, 내일의 나를 향해 기분 좋게 한 걸음 더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