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피 사탕의 온기와 삼월의 전주곡

by 뽀송드림 김은비

청천동 지사에서의 첫 퇴근길, 지사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어깨를 짓누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찬 바람에 흩날려 날아갔다. 요양보호사와는 전혀 무관한 사무 보조 알바였지만, 낯선 환경에서 실수라도 할까 봐 온종일 눈동자를 바삐 굴렸더니 뒷목이 뻐근했다. 에코백 끈을 어깨 안쪽으로 바짝 고쳐 메자 가방 속 다이어리와 보조 배터리가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직원들의 활기찬 인사가 텅 빈 퇴근길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리드미컬했다. 버스 창가에 앉아 어둠이 내린 거리를 바라보며 지난 주말의 첫 실습을 떠올렸다. 시설 구석구석을 닦아내던 대청소의 고단함과 어르신들의 식사 시간을 도와드리며 숟가락 끝에 온 마음을 담았던 기억들. 정작 낮에는 청천동 지사에서 요양과는 전혀 딴판인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으니, 내 인생이 참 다이내믹하다는 생각이 들어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새로 익힌 지사의 업무 흐름과 다가올 실습 준비물을 메모했다. 입안에서 굴리는 계피 사탕의 알싸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고단함이 성취감으로 치환되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침에 정리해 둔 정갈한 집 안 공기가 나를 반겼다. 아직 개학하지 않은 아들은 거실 소파에서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엄마, 청천동은 정복하고 왔어? 첫날인데 길 안 잃어버리고 잘 찾아왔네!" 장난기 섞인 아들의 목소리에 비로소 무거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이놈아, 엄마가 누구냐. 이제 청천동은 내 손바닥 안이다!"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아들의 그 뻔뻔한 농담이야말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가장 큰 자양강장제였다.


하지만 평화로운 저녁 식사도 잠시, 식탁 위는 이내 수강신청을 앞둔 전술 본부로 변했다. 이제 곧 대학교 삼 학년, 그 악명 높은 ‘고학번’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아직 개학 전이라 여유로운 아들과 달리,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수강신청 사이트를 미리 점검했다. 삼월 삼일 오전 열 시. 그 일분일초에 내 한 학기 스케줄과 인생의 계획이 달려있다. 평일엔 청천동의 서류 뭉치와 씨름하고, 주말엔 요양원의 온기를 살피며, 밤마다 문제집을 넘기는 이 치열한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어느덧 내 삶의 가장 뜨거운 지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집안의 공기는 평소보다 일찍 달궈졌다. 오늘은 나의 두 번째 출근날이자, 아들의 고등학교 예비소집일이다. 거실 한쪽에는 지난주에 미리 찾아와 걸어둔 빳빳한 새 교복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아직 어색하다"며 쑥스러워하면서도 거울 앞에서 교복 셔츠 깃을 세웠다 눕혔다 하며 한참을 서성였다.


"엄마, 어때? 중학교 때랑은 좀 느낌이 다르지?" 넥타이를 매만지며 묻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니 대견하면서도 묘하게 짠한 마음이 밀려왔다. 언제 이렇게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을까. 나는 아들의 어깨에 붙은 작은 먼지를 떼어주며 "그럼, 우리 아들 아주 늠름하네! 이제 진짜 고등학생 같다!"라고 힘차게 응원을 건넸다. 녀석은 가방 속에 필기구와 실내화를 챙기며 "엄마도 오늘 서류 실수하지 말고! 우린 오늘 각자의 전쟁터로 가는 거야, 알지?"라고 제법 의젓하게 대꾸했다.


다시 시작된 나의 출근 의식. 식탁 위에 에코백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내고 최종 검열을 시작했다. 밤새 기운을 꽉 채운 보조 배터리, 그리고 오늘 하루 내 목소리를 지켜줄 든든한 용병인 계피 사탕을 한 움큼 더 보충했다.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립 케어를 꼼꼼히 바르며 "오늘도 당당하게 가보자!"라고 짧은 주문을 외웠다. "엄마, 잘 다녀와!" 새 교복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을 흔드는 아들의 배웅을 뒤로하며 현관문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공기는 어제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차가운 바람 끝에 실려 온 아주 미세한 봄의 기운이 삼월의 전령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버스에 올라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었다. 화한 향이 코끝을 타고 올라오며 머릿속이 쨍하게 맑아졌다. 주말에 있을 두 번째 실습에선 지난번보다 더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하고 어르신들 식사도 정성껏 도와드려야지, 수강신청 때는 기필코 광클의 신이 강림하길 바라며 전략을 세웠다.


에코백을 품에 꼭 안은 채 청천동으로 향하는 길, 나는 깨달았다. 이 치열함은 고통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뜨거운 증거라는 것을.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알싸하고 달콤한 삼월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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