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동 지사로 향하는 두 번째 출근길,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어제보다 한결 가벼우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자, 지사에서의 적응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이다. 에코백 속에는 어제 새로 익힌 지사 행정 매뉴얼을 적은 다이어리와 보조 배터리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으로 오늘 처리해야 할 지사 비품 목록과 서류함 정리 순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멀리서 내가 탈 버스가 보였고, 급한 마음에 서둘러 뛰어가다 그만 발이 꼬일 뻔했다. 버스 계단을 성급히 오르는 순간, 어깨에 메고 있던 에코백의 지퍼가 반쯤 열려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머, 가방 조심해요! 내용물 다 쏟아지겠네!"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의 다급한 외침에 소스라치게 놀라 가방을 품에 꼭 안았다. 다행히 쏟아진 건 없었지만, 낯선 이의 참견이 민망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리에 앉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거울 대신 꺼낸 립 케어를 입술에 꼼꼼히 발랐다. "오늘도 당당하게, 실수 없이 가보자!" 나에게 짧은 주문을 외우니,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청천동의 풍경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지사 건물 앞에 도착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오랫동안 나를 이끌어주시고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신 스승님의 정갈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생일 축하해
삶에 늘 건강과 감사가 넘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짧지만 묵직한 "기도합니다"라는 그 한마디가 가슴 깊은 곳을 울렸다. 지사 행정 보조라는 이 낯선 환경에서의 고군분투조차 누군가의 기도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메시지 아래에 함께 도착한 치킨 세트 기프티콘은 오늘 하루를 버텨낼 가장 든든한 용병처럼 느껴졌다. 지사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내 손길에 어제보다 훨씬 큰 힘이 실렸다.
오전 내내 지사 내부의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서류들과 씨름했다. 지사 운영에 필요한 비품 구매 영수증을 날짜별로 편철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공문들을 분류해 파일링하는 작업은 0 하나, 번호 하나에 결과가 달라지는 정교한 일이었다. 요양과는 전혀 딴판인 일반 행정 서류들이었지만, 이 조직이 돌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초 작업이라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옆자리 대리님이 커피 한 잔을 내 책상에 놓으며 슬쩍 말을 건넸다. "와, 속도가 엄청 빠르시네요! 어제 처음 오신 분 맞아요? 벌써 이 어려운 분류 작업을 다 끝내셨네." 칭찬 섞인 말에 나는 "제가 또 한 꼼꼼하거든요. 청천동 지사는 이제 제 손바닥 안입니다!"라며 어제 아들에게 했던 농담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사무실의 딱딱했던 공기가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퇴근 시간. 책상 위 서류들을 칼같이 정리하고 컴퓨터를 껐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생일이라면서요?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직원들의 활기찬 인사가 텅 빈 퇴근길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지사 문을 나서자 찬 바람이 불어왔지만, 어제처럼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버스 창가에 앉아 어둠이 내린 거리를 바라보며 주말에 있을 요양원 실습을 떠올렸다. 낮에는 청천동 지사에서 깔끔한 서류들과 씨름하고, 주말엔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의 식사 시간을 도와드리며 온 마음을 쏟는 나의 다이내믹한 일상.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새로 익힌 지사 업무 흐름과 다가올 실습 준비물을 메모했다. 고단함이 성취감으로 치환되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예비소집일을 무사히 마치고 온 아들이 새 교복 바지를 입어보고 있었다. "엄마! 청천동 전사 귀환하셨나? 생일 축하해! 오늘 서류 실수는 안 했지?" 녀석의 뻔뻔한 농담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가장 큰 자양강장제였다. 나는 아들의 어깨에 붙은 작은 먼지를 떼어주며 "그럼, 엄마가 누구냐. 이제 진짜 고등학생 같네, 우리 아들!"이라며 힘차게 응원을 건넸다.
스승님이 보내주신 기프티콘으로 주문한 치킨이 도착했고, 식탁 위는 이내 풍성한 생일 파티장이 되었다. 바삭한 닭다리를 하나 뜯으며 아들의 고등학교 첫인상을 듣는 이 시간이 세상 그 어떤 연회보다 화려했다. 그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선생님 한 분이 보내신 메시지와 함께 송금 알림이 도착했다.
"공부하랴 일하랴 고생이 많다. 꿈을 향한 길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어."
화면을 확인한 아들이 닭다리를 든 채 짐짓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와, 대박! 엄마, 이거 뭐야? 청천동 전사님 오늘 실적 정말 좋은데? 이거 선생님이 보내신 '꿈 응원 장학금'이야, 아니면 엄마 고생한다고 하늘에서 떨어진 '멘탈 복구비'야?"
나는 쑥스러워 웃으며 "공부하고 일하느라 고생한다고 보내주셨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덧붙였다.
"엄마, 그거 그냥 돈 아니야. 엄마가 밤마다 책이랑 싸우고, 낮에는 그 딱딱한 서류들이랑 씨름하는 거 다들 알고 있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이거 아끼지 말고 엄마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고 책도 사. 아, 물론 내 간식비로 좀 떼주면 내가 더 열심히 응원해 줄 용의는 있어!"
녀석의 너스레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통장에 찍힌 숫자보다, 내 치열한 일상을 '값진 고생'으로 인정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고 그걸 제 식대로 기특하게 해석해 주는 아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알싸하고 달콤한 삼월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중이다. 이 치열함은 고통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뜨거운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