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23:30 – 전사의 취침 준비와 '숫자'의 잔상
치킨 박스를 꼼꼼히 접어 분리수거함에 내놓고 오니, 거실엔 고소한 기름 냄새와 생일의 여운이 안개처럼 가득했다. 아들은 배를 두드리며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틈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엄마, 오늘 생일 실적 좋았으니까 꿈에 엑셀 칸 나오는 꿈 꾸지 말고 푹 자. 내일 금요일이잖아. 직장인들의 성스러운 '불금'인데 사고 치면 안 되지?"
"걱정 마. 엄마는 이미 청천동 지사의 시스템을 80%는 동기화 완료했어. 나머지는 내일 채우면 돼."
호기롭게 대답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눈을 감으니 오늘 마주했던 숫자들과 이름들이 망막 위에 둥둥 떠다녔다. 스승님이 보내주신 기프티콘과 지인 선생님이 보내주신 '꿈 응원 장학금'. 그 따뜻한 마음들이 통장 잔고라는 차가운 숫자보다 훨씬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래, 내일은 금요일. 지사 업무를 칼같이 마무리하고 주말 주간보호 실습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잘 놓아야지. 내 인생의 행정 처리도 깔끔하게!'
스마트폰 알람을 06:20에 맞췄다. 화면 위로 "생일 축하해"라는 메시지들이 여전히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내일도 무사히, 모레는 다정하게." 목요일 밤의 어둠이 이불처럼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금요일 07:10 – 세 번째 출근길, 공기와 풍경의 변화
금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들의 교복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아들, 오늘 금요일이야! 오늘만 잘 버티면 주말... 아니, 엄마는 실습이지. 아무튼 일어나! 전사의 아침이다!"
지사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 어제의 민망했던 '에코백 지퍼 사건' 덕분에 오늘은 버스에 오르기 전 지퍼를 두 번이나 확인하는 강박적인 습관이 생겼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청천동의 풍경이 이제 제법 눈에 익었다.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편의점 간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일정한 각도, 그리고 지사 건물 앞을 지키는 늠름한 가로수까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어제 퇴근 전 정리해둔 파일철들이 나를 반겼다. 내 손때가 묻기 시작한 책상 위에는 어느새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행정실: 비품 목록 누락분 확인 및 14시까지 보고 바람]
그 포스트잇은 마치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에게 내려진 밀서 같았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마우스를 잡았다.
금요일 14:00 – '불금'의 서류 전쟁과 핑크색 예고편
금요일의 지사는 평소보다 1.5배 정도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주말을 앞두고 처리해야 할 공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복사기는 쉴 새 없이 뜨거운 숨을 뱉어냈고, 나는 그 리듬에 맞춰 용지를 채우고 영수증을 날짜별로 편철했다.
"와, 전사님! 진짜 손이 전광석화네요. 금요일이라 다들 예민해서 공기가 팽팽했는데, 전사님이 정리해 주시니까 행정실 산소가 맑아지는 기분이에요."
대리님의 진심 어린 칭찬에 어깨가 으쓱했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지사 행정 보조'라는 명찰이, 이제는 내가 만든 서류 뭉치들이 이 거대한 조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슬며시 기분 좋은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퇴근만 하면 맥주 한 잔의 '불금'을 즐길 다른 직원들과 달리, 나는 퇴근 직후부터 뇌의 주파수를 '주간보호 실습 모드'로 튜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방 구석에 얌전히 접혀 있는 핑크색 앞치마가 마치 "나도 잊지 마"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금요일 18:00 – 퇴근, 그리고 이중생활의 찬란한 시작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주말 잘 보내세요!"
지사 문을 나서자 차가운 저녁 바람이 뺨을 스쳤다. 하지만 가방 안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했다. 지사 매뉴얼 대신 주말 실습을 위한 실습 일지와 보건증, 그리고 핑크색 앞치마가 들어있었다.
버스에 앉아 휴대폰을 켜니 아들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제법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고 거울 앞에서 폼을 잡고 있는 아들의 셀카였다.
[아들]: 엄마, 나 이제 넥타이 마스터함. 장가갈 때까지 이 실력 유지한다. 오늘 저녁은 청천동 전사님 기운 보충용으로 내가 편의점 화끈하게 털어놓을게. 얼른 와서 같이 털자!
피식 웃음이 났다. 지사에서의 팽팽한 긴장을 내려놓고, 이제 내일 마주할 어르신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엑셀의 정교한 숫자들과 어르신들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미소. 그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나의 삼월은 확실히 남들보다 두 배로 뜨겁고, 세 배로 진했다.
나는 지사 건물을 뒤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행정 전사 퇴근, 실습생 출격 준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