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3월의 기록

by 뽀송드림 김은비

어스름한 새벽,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향한다. 전날 미리 담가둔 미역이 통통하게 불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냄비에 참기름을 넉넉히 둘러 다진 마늘을 넣고 선홍빛 소고기를 볶기 시작한다. 고기가 익어가며 내는 고소한 향이 집안의 잠을 깨우면, 불린 미역을 넣고 한 번 더 달달 볶다가 물을 붓는다. 보글보글 국이 끓어오르는 동안 옆 화구에서는 노란 계란물을 풀어 정성스레 계란말이를 돌돌 만다.

"엄마, 오늘 메뉴 최고!"라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부지런히 숟가락을 드는 아들의 모습에 밤새 쌓인 피로가 잠시 씻겨 나간다.

"오늘 학교 잘 다녀와. 엄마는 오늘 집에서 일하니까."
"알았어, 엄마도 오늘 너무 무리하지 마."

현관문 앞에서 건네는 아들의 다정한 인사가 마음을 울린다. 씩씩하게 등교하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집안엔 정적이 찾아온다. 오늘은 다행히 재택근무를 하는 날. 노트북을 켜고 밀린 정산 자료를 검토하며 엑셀 칸을 하나하나 채워나간다. 거래처에 보낼 메일을 작성하고, 전화기 너머로 업무 협의를 이어가다 보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출퇴근 시간을 아껴 장기요양제도 문제를 한 페이지라도 더 풀어볼 수 있음에 안도하며, 모니터 불빛 아래서 치열하게 업무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숨 돌릴 틈은 잠시뿐이다. 3월의 달력은 여전히 빈틈없이 빽빽하다. 낮에는 근무로 업무를 소화하고, 일주일에 세 번은 어스름한 저녁 빛을 받으며 야간 대학 강의실로 향한다. 꼬박 4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주말이면 쉴 틈 없이 실습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고, 3월 말에 있을 필기시험이라는 큰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체력은 바닥을 보이고, 때로는 '내가 과연 다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할 때,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든다. 오른손이 아닌, 조금은 서툴고 느린 '왼손'으로 말이다.

서툰 첫 줄도, 공부 중인 낙서도 사랑스러워
하루의 끝에서 나를 만나는 시간. 비뚤비뚤하게 써 내려가는 왼손의 문장들은 나를 향한 가장 솔직한 고백이 된다. 완벽하게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정답을 맞히기 위해 치열하게 적어 내려간 요점 정리보다, 그 옆에 지쳐서 무심코 그려 넣은 작은 낙서들이 오늘따라 유독 사랑스럽다. 예쁘게 쓰려 애쓰지 않은 서툰 첫 줄 속에는 오늘 하루를 버텨낸 나의 정직한 땀방울이 배어 있다. 매끄럽지 않은 글씨체마저 나를 닮아 대견하고 기특하다. 이것이 오늘 내가 나에게 건네는 최고의 칭찬이다.

힘든 와중에도 글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감사해
몸은 부서질 듯 고단하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인데, 신기하게도 내 안에서는 자꾸만 문장들이 샘솟는다. 재택근무와 야간 수업, 주말 실습까지 이어지는 이 폭풍 같은 3월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기록하고 싶고 세상을 향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 그것은 내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자 위로다. 이 고단함마저 글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내 안에 살아있어 주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창밖은 여전히 흐리고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다. 하지만 내 왼손 끝에서 피어난 이 짧은 고백들이 난로처럼 내 마음을 덥힌다. 비록 지금은 왼손 글씨처럼 내 삶이 조금 비뚤비뚤하고 서툴러 보일지라도, 이 모든 과정이 끝나는 날 나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가장 힘겨웠던 3월의 그 밤들이, 실은 내 생애 가장 빛나는 기적의 밑거름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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