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 다른 시간
등산일 : 21년 12월 눈 내린 겨울과 22년 5월 철쭉 만개한 봄
오른 곳: 남원 지리산 바래봉
높이: 해발 1,165m
코스: 남원 지리산 허브밸리 주차장 → 수목원 지나서 → 운지사 갈림길 → 노란색 이정표 방향 → 바래봉 쉼터 1~5번 → 바래봉 정상 원점회귀
길이: 총 9.7km
등반 시간: 총 3시간 30분 (사진 촬영 시간, 휴게 시간 포함)
난이도 : 하 (등산 초보 추천 코스, 1~3 쉼터는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험한 등산로는 없음)
바래봉은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 하나입니다. 세석평전과 함께 전국 제일의 철쭉 군락지로 유명하며, 산의 모습이 바리때1)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바래봉이라고 부릅니다. 남원에 본가가 있어 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바래봉을 자주 찾았습니다.
바래봉과의 첫 만남은 21년 겨울이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산은 처음이라 잔뜩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귀마개 모자부터 넥워머, 장갑, 스패츠, 아이젠까지 안전한 산행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을 하고 갔습니다. 산행 당일 새벽까지 눈이 내렸고 습도는 90%, 기온은 영하 1~2도, 바람은 1~2m/s로 첫 설산 산행으로는 최고의 조건이었습니다. 너무 춥거나 바람이 많이 불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고, 다시는 겨울 산행을 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공적인 첫 눈꽃산행을 시작으로 그 겨울에 3번 더 바래봉을 찾았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고 바람이 거센 바래봉을 만났고, 바람 없이 눈만 조용히 내리는 포근한 바래봉도 만났고, 눈이 많이 쌓인 고요한 바래봉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봄에 다시 찾은 바래봉은 다른 산으로 착각할 만큼 새로운 모습이었습니다.
바래봉을 이렇게 자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상 주변이 나무 없는 초지이고, 산세가 둥그스름하며, 가파르거나 험한 등산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산행도 수월했고, 등산이 익숙지 않은 어머니와도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매년 봄엔 철쭉 축제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인 만큼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바래봉까지 오르는 동안 총 5개의 쉼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1번에서 3번 쉼터까지는 꾸준한 오르막이어서 체력적으로 힘들 수 있지만 쉼터마다 쉬어간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습니다. 3번 쉼터를 지나고는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겨울에는 눈꽃을, 봄에는 철쭉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1) 승려들이 공양할 때 사용하는 식기로 발우라고도 한다.
등산 코스 : 남원 지리산 허브밸리 주차장 → 수목원 지나서 → 운지사 갈림길 → 노란색 이정표 방향 → 바래봉 탐방로 입구 → 바래봉 쉼터 1~5번 → 바래봉, 팔랑치 갈림길 → 바래봉 정상 원점 회귀
주차장에서 등산로 초입까지 완만한 포장도로를 걷습니다. 양쪽 길가에는 조팝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펴있습니다. 철쭉 축제를 알리는 팡파르처럼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꽃잎과 그 향기에 취해 설레는 마음을 가득 담아 등산로 입구로 향합니다. 등산로 초입 곳곳에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지만 바래봉을 오르다 보면 구석구석이 포토존이 됩니다.
운지사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100m 거리에 있는 등산로 초입부터 자갈길을 따라 등산을 시작합니다. 운봉읍 뒤로 광활한 지리산 자락이 등산객을 맞아줍니다. 이곳은 계절 관측 군락지로, 남원 지리산 바래봉 철쭉 군락지의 개화 시기를 관측하기 위해 기상청이 지정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3개의 도와 5개의 시, 군에 걸쳐있는 거대한 산입니다. 넓은 지역에 걸쳐있는 만큼 난대림에서 한대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물과 생물이 분포되어 있는데요. 그중 5월이 되면 철쭉이 지리산 전체를 뒤덮습니다. 1970년대에 지리산 일대에 방목하여 키운 양이 독성이 있는 철쭉만 남기고 모든 잡초와 풀을 먹어 치웠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곳을 ‘양 떼가 가꾼 철쭉 정원’이라고도 부릅니다.
겨울에만 찾았던 바래봉 탐방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됩니다. 다행히 계단은 없고 잘 정비된 돌길이 쭉 이어집니다.
쉼터 3번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입니다. 등산할 땐 몰랐는데 하산할 때 보니 상당히 가파른 등산로였어요. 발목이 낮은 로우컷 등산화를 신고 간 날은 하산 시 발이 앞으로 쏠려서 발가락이 굉장히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오르다가 잠시 쉬어가려고 허리 한번 펴면 절경이 펼쳐집니다. 눈호강을 하고 몸과 마음에 쉼을 얻고 다시 힘을 내서 오릅니다. 쉼터 3번 이후로는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겨울에는 경이로운 눈꽃과 상고대를, 봄에는 설레는 철쭉을 감상하며 오를 수 있습니다.
겨울의 바래봉에서는 이정표에 달린 상고대도 마냥 신기합니다. 철쭉 가지에 엉겨 붙은 눈은 자연이 빚은 조각 같아 넋을 놓고 바라봅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봄의 바래봉에서는 지천으로 널린 철쭉과 여기저기 핀 이름 모를 꽃들을 구경하며 온통 초록빛과 분홍빛으로 물든 등산로를 지납니다. 봄이 주는 설렘을 가득 느낍니다.
정상을 600m 남겨놓고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팔랑치로 가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겨울에는 지리산 종주 코스가 아니라면 바로 바래봉으로 가시고, 봄에는 팔랑치 철쭉군락지를 보러 가세요. 팔랑치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철쭉군락지입니다.
바래봉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사철나무 사이로 좁은 길을 통과하게 됩니다. 겨울에 사철나무에 눈이 많이 쌓이면 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축 처지는데요, 그 밑으로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좁은 나무 사잇길을 지나면 사방이 트인 나무 계단이 나옵니다. 이 계단은 겨울에는 강한 바람을 오롯이 받아내야 하는 바람 길목이고, 봄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룬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지리산 사철나무의 꿋꿋함과 수묵화의 한 장면 같은 산그리메(산 그림자)가 황홀하게 펼쳐집니다.
계단의 끝에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천왕봉까지 지리산 자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지리산의 모든 봉우리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100m 정도 야자 매트가 깔린 등산로를 오르면 바래봉 정상석에 도착합니다. 바래봉 정상석에서는 재미있는 사진을 연출할 수 있어요. 뒤편에 있는 바위에 올라가서 점프할 때 카메라 앵글을 잘 맞추면 바래봉 정상석 위의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산을 생각해 보면 힘들었던 기억은 없고 좋았던 장면만 기억에 남습니다. 땀을 식혀준 찰나의 바람,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볕, 정상에서 바라본 빼곡하고 푸르른 녹음, 아찔한 암릉 절벽의 매력, 특히 겨우내 삭막했던 산들이 새로 돋은 잎으로 풍성해질 때, 시작, 생명, 살아있음, 안도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매번 다른 바래봉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록입니다. 언젠가부터 산을 다녀와서는 항상 블로그에 그날의 날씨, 복장, 산의 모습, 기분을 남기는데 시간이 지나 한 번씩 읽어보면 그날의 기억이 다시 생생해집니다. 기록을 남기기 전에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산을 다녀왔는지, 지금 기억하고 있는 산의 모습이 어느 산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산에서의 추억이 휘발되는 것 같아 속상했습니다. 추억뿐만 아니라 그 산에 가기 위해 들였던 모든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 같았습니다.
오감으로 느끼고 기억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거나 왜곡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기록은 내가 어디에 있든, 어느 시간대이든 상관없이 그 장소, 그 시간으로 데려다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난 기록을 보며 겨울의 바래봉과 봄의 바래봉을 다녀오고 있습니다. 겨울, 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매번 다른 사람이었던 저를 새삼 발견하게 합니다. 매일 운동하러 가는 것 같은 무념무상의 어느 날의 나, 고민을 한가득 챙겨 온 어느 날의 나, 어머니 모시고 산행 가이드가 된 어느 날의 나, 오롯이 등산에만 집중한 어느 날의 나…….
산도 봄·여름·가을·겨울 해마다 같은 옷으로 갈아입는 것 같지만 시나브로 저와 같이 나이 들어가겠죠. 해마다 찾는 바래봉의 변화의 순간들도 기록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글_정이란
산을 먼저 맛봐드리는 기미‘산’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