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물론 나만의 방도 생겼다는 것이 포인트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작가가 되려면 자기만의 방과 약간의 돈이 필요하다' 라고 썼는데, 남편 Y가 내게 요구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과 적절한 아이템을 구매할 만한 용돈. Y는 여자도 작가도 아니긴 한데
첫 글에서 썼듯이, 원래 이 집의 초기 계획에는 남편만의 호러룸이 들어 있었다. (참고글: 어떻게 단독주택을 살 생각을 했어?)
공포, 좀비, 외계인 등의 호러+SF에 심취해 있는 Y는 집에 자신만의 호러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컬렉션은 내가 수집한 책이나 영화와 그다지 잘 어울리지는 않은 상태로 간신히 균형을 맞추어 집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빽빽하게 꽂힌 서재에서 아내의 티(Tea) 컬렉션에 밀려 점차 자신의 호러 컬렉션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지금은 종방하였지만 한때 남자들 사이에 작은(!) 돌풍을 일으켰던 《수방사 -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거실에 잔디를 깔아서 야구장이나 캠핑장으로 만들고, 집에 포장마차를 설치하거나, 거실 바닥을 뜯어서 RC카 레이싱 레일을 만든다든지 - 암튼 여러모로 레전드 영상이 우후죽순처럼 나왔던 프로그램이다.
남성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아 정규방송으로 편성되었다는데 그 못지 않은 열화와 같은 반대 여론이 있었는지(?) 시즌 2를 끝으로 더 이상 방송을 안 하고 있다.
최근에 집 관련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공통적으로 '남자만의 방'을 갖고 싶다고 외치는 남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보통 대부분의 방은 부부 공동이며 키친은 대부분 여성들의 차지이고 - 요리를 많이 하는 남편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 자녀들은 각자의 방을 갖고 있다. 한국의 일반 아파트 구조에서는 남자들이 갈 곳이 거실 뿐인데, 거실을 전용 공간으로 독차지하면 독재자 남편이자 아빠로 구박을 받는다.
우리도 처음에 결혼을 하고 이 부분에서 곤란을 겪었다. 10년 넘게 홀로 살아온 생활에 익숙한 나는 부부가 된 뒤에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같이 있을 때도 때때로 혼자만의 핸드폰 검색이나 생각에 빠져 있는 내게 Y는 지속적으로 서운함을 느꼈던 것. 그렇다고 해서 Y도 마냥 같이 있는 시간만을 원한 것은 아니었고 혼자 놀거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모든 공간이 공동이었던 우리 신혼집의 구조상 어려움이 있었다.
집을 고쳐 짓고 살게 되면서 이 부분을 해결해 보고자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여러 가지를 해 보고 싶었던 우리는 각자의 방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순위를 미뤘고, 결국 Y가 처음에 원했던 'Y의 호러룸'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다 에어비앤비를 하고 있던 반지하 공간이 코로나19로 인해 그 기능을 상실했다. 처음에는 곧 괜찮아지겠지, 생각했지만 지금 이 시점 누구나 공감하듯이, 이 바이러스 유행은 단기간 내에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여기를 우리 취미방이나 작업실로 만들어서 써 보면 어떨까?
때마침 브런치를 시작한 나를 꼬드겨(!) Y는 지하 공간에 있는 두 개의 방을 각자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계획은 기존의 공간 활용처럼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쓰는 계획이긴 하지만, 사실 삶의 어느 순간에는 각자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둘 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만족스러운 상황이다. 어쩌다 보니 집에 프로젝터와 스크린이 두 개씩 들어오게 된 상황이긴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비용으로 각자의 방을 꾸몄다. Y의 취미인 영화 감상과 공포 게임을 위해 마스킹된 시네마 스크린을 들여 왔고, 내 방에는 다구와 차를 비롯해 글을 쓰는 곳으로 차근히 꾸며 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이 방들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부부의 생활에 있어서 개인 시간이나 취미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물론 남편에게 게임의 길을 열어준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좀 애매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