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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Nov 03. 2021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만사가 귀찮다

 이상하리만큼 무기력한 날이었다. 뭐라고 해보겠다고 몸을 움직여보지만 그보다 먼저 한숨이 앞선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다운되는지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다. 귀찮다는 말을 들숨처럼 내뱉다 보니 만사가 더 귀찮게 느껴진다. 누워있어도 귀찮다. 그냥 다- 귀찮다.



 오늘 기분이 별로라는 것은 아침에 이미 증명됐다. 여고생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이상한 꿈을 꿨고, 5시 50분에 의도치 않게 눈이 떠졌으며, 본능적으로 명상 앱을 틀었기 때문이다. 출근을 위한 일련의 행위가 필요했다. 월요병 말기인가. 이 또한 매우 귀찮았지만 이 행위를 하지 않으면 출근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어딘가 고여있는 느낌이 든다. 고이다 못해 녹여지고 있는 기분이 들어 내 몸 가장자리부터 아릿함이 느껴진다. 나는 소모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멀쩡해 보이는 속 빈 육신을 끌고 이리저리 쏘다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가 없기에 뭐라도 해낸다.  



  이런 어두움이 나를 덮쳐버리는 기분이 들 때 해결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냥 뭔가를 하는 것이다. 어둠은 피할 수 없다.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들을 해치우기 시작한다.

 일단,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내 두 발로 걷어찬 이불을 다시 이쁘게 개고 세수하러 방을 나선다. 그리곤 출력 값을 입력한 AI처럼 8시 50분까지 회사 도착 완료. 6시까지 꾸역꾸역 앉아서, 어영부영 퇴근까지 해냈다. 내일 비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세차까지 했다. 그냥 오늘 하고 싶어서 했다.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했다는 이상한 결론. 무튼 깨끗해진 뚱띵이(10년 된 내 중고차)를 몰고 새로운 주유소를 가는 도전도 성공. NEW 주유소에서 물티슈도 받아서 신이 나기까지 했다.



  작은 회사에서 상사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던 시절이 흐릿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이럴 때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이 감사하다. 그때의 일을 모두 품고 살기엔 내 마음이 너무 작고 너무 여린 걸.

 그도 나와 안 맞는다 느꼈겠지만 모든 회사는 부하직원이 상사직원보다 괴롭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조금 더 괴로웠을 거라 확신한다. 자존감이 낮아 자존심이 쌨던 그는 주 업무가 거래처와 싸우기, 특기가 본인보다 잘난 사람 허점 잡아 비꼬기였다. 그의 취미 중 하나는 사람의 급을 나누고 평가하는 것이었는데, 기준은 크게 두 개로 나뉘었다. 필드(학계)로 갈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 나는 물론 후자로 분류가 됐다. 나 또한 학계로 갈 생각을 태어나서 단 한! 번! 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너는 회사가 어울려" 란 말이 썩 유쾌하게 들리진 않았다. 그가 깨끗하게 도를 불러도 파#로 들렸을 때라, 사회생활 잘할 것 같단 말을 고깝게 해석했을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엔 그랬다.



 그 시절과 정.확.히 반대인 고민들로 지금 힘겨워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나는 회사가 어울리는 사람일까? 회사가 다니기 싫어서 다른 일을 찾아보는 비겁한 일을 하고 싶지 않기에 좋아하는 일을 먼저 찾아보려 하는데 쉽지 않다. 공기업 입사를 목표를 삼았을 때부터 과장이 되고 팀장이 되는 그런 번듯한 모습까진 그려보지 않았다. 나의 인생에 김 과장은 보이지 않아도 김대리 정도는 스쳐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럴 거면 왜 굳이 그렇게 노력해서 흔히 일컫는 철통밥 공기업에 들어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곳도 나에게 학위 같은 곳이지 않을까? 다음 스텝을 위한 한 줄짜리 스펙. 학교는 그래도 졸업이라는 '끝'이 있어서 즐겁고 설레서 다녔는데, 회사는 내가 평생 살아온 만큼 다녀야 겨우 정년퇴직을 할 수 있다는 게 갑갑하게 느껴지나 보다.


  나는 평소엔 잔잔히 살아가다 급발진하는 걸 즐겨하곤 했다. 캐시백 1-2%으로 100원, 200원을 깨작깨작 모으면서 수십만 원 애플 워치는 그냥 질렀다. 남들 다 잘 다니는 대학교를 1년 만에 자퇴하기도 했으며 (살면서 잘한 일 top 5 중 하나), 20만 원을 써서 범퍼만 고치면 되는 일을 2,000만 원을 써서 차를 바꿔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아주 다행히 돈이 없어 충동으로 끝났지만.


 또 다른 급발진을 설계할 시점이 된 것 같다. 항상 괜찮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해결될 일도 없다. 그냥 흘러가기를 기다려본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지난날보다 나아졌음에 위안삼아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가 생길 때 조금 더 멋져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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