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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May 03. 2024

휴직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난 3년간, 아니 그보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왔던 시간이었다. 휴직. 정확히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나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시간.

이는 그동안 내가 나의 시간을 내 마음대로 보내지 못했음을, 동시에 완전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내가 내 시간으로 쉬겠다는 데 스스로 정당성을 찾는 것이 꽤나 웃기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매달 같은 날짜에 찍히는 계좌 속 숫자에 심하게 중독됐던 이로써, 그렇게 원하던 시간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함을 느꼈다.

자주 쫓기는 꿈을 꿨고 머리가 아팠으며 새로 생긴 내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출처 없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상했다. 주변 모든 사람이 아이와 너를 위해서 쉬어야 한다고 입모아 말하는데 왜 나는 아침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적고, 채우지 못한 체크 박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까. 천성이라지. 그래서 나에게 남는 게 있었던가. 아직 잘 모르겠다.



환경이 변하면서 자연스레 관심사가 바뀌었다.

변해가는 몸에 우울감을 느끼면서도 우리의 영향을 가득 받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일임을 느낀다.

누구나 겪지만, 당연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가치관과 삶의 관심, 방향을 바꿔놓기에 충분한 변화였다.


이 또한 책임감이었다. 당분간 우리가 세상의 전부일 아이에게 어떠한 세상을 줄 것인지, 어떠한 가치관을 심어줄 것인지 충분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임에 대한 두려움,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막연함. 온갖불명확한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 변화가 싫다거나 피해야 할 일이라고 결코 생각하진 않는다. 이 아기가 우리에게 줄 새로운 세상을 온전히 만끽해야겠다는 생각 뿐.



휴직 3개월 차. 시간의 풍요로움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옅은 죄책감을 가지고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본능적인 현실주의자면서 동시에 멋진 이상을 추구하길 바라는 전형적인 욕심쟁이의 모습을 띠면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죄책감에 허덕이지만 감사함 느껴야 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나에게 주입하며 매일 늦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아기를 만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을 비슷하게 보내지 않을까.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시간들을 조금 더 기록했으면 하는 것.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아까운 이 시간을 느끼기 위해 집 앞을 나선다.

문을 나서자 봄과 여름 사이의 따뜻한 바람 향기가 스친다. 자연스레 웃음이 난다.

25주가 되어 태동이 활발해진 뱃속의 아기가 오후 활동의 시작을 알렸다. 희망이 일어났구나.

이걸로 됐다. 오늘도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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