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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Dec 18. 2019

스타의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에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이돌 앨범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두 장씩이나. 아이돌 음악을 낮잡아 보는 것은 아니다. 요즘 시대 보통 사람들에게 CD를 따로 소장하는 것은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으로 한정되지 싶은데, 그렇지는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저 두 장은 직접 구입한 것은 아니다. 하나는 강다니엘 솔로 [color on me], 다른 하나는 이진혁 솔로 [S.O.L], 내게 아이돌 덕질의 신세계를 알려주고 있는 K와 S가 각각 준 것이다. 받는 내 취향은 아니고 그녀들의 아이돌이다. 주는 대가는?, '자신의 스타에게 관심 한 번 더 주기'라고 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사실 숨은 이유가 있다. 듣자 하니, 아이돌 팬 사인회 티켓은 공식적으로는 앨범을 구매한 사람들 중 추첨이다. 그러나 실제는 구매력 줄 세우기라고 한다. 결국 여러 장 산 순서로 당첨이 갈린단다. 그러니까 팬 사인회 티켓 한 장을 얻기 위해 그녀들은 같은 앨범을 여러 장 샀고 나를 포함해 지인들에게 홍보라는 이유를 달고 나눠주며 ‘소진’ 중인 것이다. 사인회의 힘이 참 세다.


L) 아이돌 앨범의 메인은 사진, 사진, R) 대신 부끄러웠던 친구들 덕


대학 친구들과 송년회로 모였다. K와 S가 열혈 덕질 중이다 보니 우리의 대화는 연예인에 대한 팬심 이야기로 상당 채워졌다. 그런 중 나온 S의 폭로,


“신성록 나오자마자 M이 ‘꺄~악’ 소리 내며 쫓아가서 그때 좀 창피했어.” 


십여 년 전 신성록 사인을 받겠다고 뮤지컬을 관람한 후 배우 퇴근을 기다렸던 ‘내’ 얘기다. 떠올려 보니 내가 그랬다. 좋아하는 스타 사인에 꽤나 집착했다. 공식 사인회를 쫓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소심하게 욕심을 낸 덕에 소장하게 된 것들 중에는, 나의 호들갑에 부끄러움은 친구들 몫이었던 신성록 사인보다 더 사연 있는 사인이 하나 있다.




때는 2008년 2월, 델리스파이스의 보컬인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스위트피 Sweetpea의 3집 발매 기념 공연이 있었다. 델리스파이스의 음악도 물론이지만 스위트피 2집을 워낙 좋아했기에 3집이 발표됐을 때는 김민규에게 아주 푹 빠졌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예매를 해서’는 사실 아니고, 뭣 때문이었는지 공연 보러 갈 상황은 아니라고, 아마 졸업 논문 쓰던 때라 여유가 없었을 터, 친구들이 같이 가자는 것도 ‘나는 못 가’ 뿌리쳤었다. 그런데 공연 당일, 당시 잡지 [Paper]의 웹사이트 게시판에 자주 들어갔었는데, 거기서 ‘스위트피 공연 동행 급구’를 보았던 것이다. ‘갑자기 함께 가기로 한 사람이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되었는데, 본인은 공연을 꼭 보고 싶기에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봐도 괜찮다면 정가로 한 장을 양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예매 오픈부터 단호히 동여맨 마음이 그 글을 본 그 순간, 어떻게 바로 ‘이건 공연을 보라는 계시다’로 바뀌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다. 여하튼 그래서 급하게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갔는데, 나, 그 와중에 CD를 챙겼다.


공연장은 삼성동에 있는 백암아트홀, 크지 않은 곳이라 구조가 뻔해서 지하가 대기실인 것을 알고 있었고 공연이 끝난 후 1층에서 무턱대고 김민규를 기다렸다. 뮤지컬 배우 퇴근길 배웅은 흔한 풍경이나 그날 그곳은 전혀 아니었다. 우리 일행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시간이 꽤 되어 대부분의 관객들이 빠져나가 로비는 한산했다. 굳게 충전한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드디어 지하에서 사람이 올라왔다. 바로 ‘김민규’였……으면 또 “꺄~악” 소리를 냈겠으나 나타난 이는 ‘타루’였다. 3집 타이틀곡을 피처링했기 때문에 그날 게스트로 나왔었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어떤?"

"저, CD에 김민규 님 사인 좀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생각할수록 내가 그날 제정신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TV에 자주 나오는 메이저는 아니더라도 당시 홍대 여신 중 한 분으로 불리던 ‘가수’분께 이 무슨 행패인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녀가 그 부탁을 기꺼이 들어줬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위트피 3집 앨범 표지에는 ‘김민규’의 사인이 남았다.


얼마 전, 다른 CD를 찾다가 함께 들으려고 그 앨범도 꺼냈다. CD를 재생해서 음악을 듣는 시대가 아니니 종종 노래를 찾아들었어도 CD를 직접 꺼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시 들으니 가사도 새삼스러워서 가사집까지 펼쳐 보게 되었는데......


'어머나, 세상에!'


[떠나가지마] 가사가 있는 페이지에 ‘타루’ 사인이 있었다. 말하고자 했던 사연의 주인공은 김민규가 아니라 바로 타루의 사인이다. 그날 타루는 기가 막히고도 남을 부탁을 받고서도 불쾌감을 표 하기커녕, 직접 부른 노래가 쓰인 곳에 친히 자신의 사인까지 남겨 놓았다. 그리고 참 못할 짓을 했던 나는 더 가관으로 그 사인을 십 년이 더 지나서야 발견한 것이다. 정말 너무 미안했고 많이 고마웠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날의 행동을 반성했다.


나의 특별한 스위트피 3집 [거절하지 못할 제안]




사인을 받는다는 것,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이돌 팬 사인회가 간절한 것은 아무렴 직접 만날 기회인 이유겠지만 거기서 받은 스타의 사인은 두고두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지금의 청장년에게 유시민 작가는 호불호를 떠나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람이겠지만 나는 출간 사인회에서 그분이 이름과 함께 적어 주신 문장 ‘생각은 힘이 세다’로 가장 먼저 떠올린다. 내가 작가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지인은 한 다리 건너 출판사에 다니는 이를 통해 저자가 친필 사인한 책을 내게 선물했다. 그런데 나를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사인을 받을 때 내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결국 본인 이름을 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책은 결국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모양인데, 나는 작가의 사인만으로 그 책이 특별하다. 스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언젠가는 시들기도 하고 그래서 부질없는 한 때의 덕질일 뿐일 수도 있지만 사인을 받는다는 것,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아주 가볍지는 않지 않을까. 책장 구석에 꽂아둔 채 잊어버렸다가도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다면 나의 영웅은, 영웅을 사랑한 나의 열정은 잠깐이나마 되살아나지는 않을까.


나는 아마 가수 ‘타루’는 평생 잊지 않을 것 같다. 저 기막힌 사연으로 남은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잊겠나.

타루님, 미안했고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남긴 이름은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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