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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Dec 25. 2019

조심해 친구!! 인생은 사고야!

무사고는 아니지만, 다행입니다.

'삐오삐오'

죽전휴게소를 지날 때쯤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쪽이지? 내 차선이면 피해 줘야 하는데......'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다 가장 안쪽 버스 전용 차선을 이용해 내 옆을 지나갔다. 고속도로를 오가는 중 사이렌 소리가 처음은 아니다. 사고 현장을 직접 보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구급차가 속도를 내며 달리는 모습은 한 번도 없는 날이 오히려 드물다. 그래서 “OO 도로가 사고 수습 중으로 정체입니다.” 키워드는 ‘사고’가 아니라 ‘정체’인 라디오 교통 방송처럼 보통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소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쨍그랑' 미는 힘이 과했나 보다. 배식 테이블 위 식판이 미끄러졌다. 다행히 안에 든 밥을 쏟지 않았지만 스테인리스 주발 뚜껑과 수저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얼른 주웠지만 식당 안 사람들 시선은 이미 내 쪽으로 쏠렸다.


드디어 ‘시스템 종료’, 가방만 챙겨 바로 나가기엔 책상이 너무 지저분했다. 테이크 아웃 컵과 과자 봉지, 등 쓰레기를 한데 모으고 물티슈를 꺼냈다. 헉, 닦는 반경이 너무 넓었을까, 모니터 앞에 놓인 작은 화분이 쓰러졌다. 이번에도 다행히 식물이 망가지진 않았지만 맨 위를 살포시 덮고 있던 자갈 흙은 그대로 쏟아지고 말았다.


사이렌 소리에 낮에 있었던 두 사건이 떠올랐다. 별일 아닐 수도 있었지만 정신이 번뜩 들었다. “실연당한 날은 운전하지 말아라.” 운전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누군가가 해 준 조언이었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때 운전은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헤어질 연인은 있지도 않지만 평소 안 하던 실수를 두 가지나 했다면, 오늘 내 마음은 보통보다 최소 반 템포는 급하다는 신호였다.


예정에 없던 회의가 월요일에 두 건이나 갑자기 생겨 자료를 준비한다고 다른 토요일보다 바빴다. 저녁에는 진작 잡힌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마냥 ‘나, 죽었소.’ 하고 주말을 온전히 반납할 수도 없어서 더 촉박했다. 그래도 퇴근 시간을 많이 오버하지 않고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화분을 엎지르는 바람에 적어도 십 분은 잡아먹었다. 토요일 오후 상행 경부고속도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막힐 수는 없었다. 차가 움직이는 속도는 삼십을 넘지 못하는데 시간은 어쩜 이리도 빠른지 약속 시간까지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곧 금방 다시 멈출 줄 알면서도 앞 차와 공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급하게 액셀을 밟고 빨간 등이 켜지면 ‘번쩍’ 깜박이는 속도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점점 멀어질 뿐인 내비게이션 도착 예상 시간은 쳐다본다고 다시 앞당겨지지 않는데 시선은 자꾸 그쪽으로 갔다. 정체 구간에서는 속력이 낮으니 큰 사고는 적지만 가다 서다 중 ‘아차’ 하는 순간에 나는 접촉 사고가 잦은 법이거늘, 조바심에 온갖 불안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사고’라는 단어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교통사고나 화재 같은, 그야말로 사고다. 다음으로 나는 회사에서 종종 ‘사고’를 언급하게 되는데, 제조업은 고객과 약속한 물량 생산이 가장 큰 목표이기 때문에 공정 조건이 잘못되었거나 설비 이상으로 불량이 발생하여 물량에 기여할 수 없게 되는 경우, ‘사고’라고 한다. 그리고 '사고'가 무서운 이유가 후유증이라면 몸이 다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부딪침도 사고일 수 있겠다.


사고 : [명사]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사전적 의미처럼 사고는 예고 없이 온다. 뉴스에서 갖가지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놀라는 것은 ‘전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어떻게 저런 일이!’ 매번 기가 막힌다. 그런데, 뜻밖의 불행이 내 몫일 수도 있음은 자주, 아니 대개 잊고 살았다. 주말 출퇴근하는 고속도로뿐 아니라, 가까이에 종합병원이 있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도 자주 사이렌 소리를 듣는데, 그 소리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으니 참으로 어리석다.


해가 바뀌는 것에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었는데, 사이렌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그 고속도로에서 2019년, 올해를 생각했다. 조심성이라고는 일도 없이 운전한 날이 오늘만은 아니었을 텐데, 단순히 시간에 쫓겨서가 아니라 정말 마음이 어지러웠던 날도 있었는데, 작은 접촉 사고 한 번 없었다. 꼭 교통사고가 아니더라도 크게 다치거나 아프지도 않았다. 물론 회사에는 별의별 일이 많았다. 경영진들은 늘 비상이라고 하기 때문에 특별히 위기감이 들지는 않지만, 다양한 형태로 문제들이 생겼었다. 그런데 어찌어찌 잘 수습했고 부서가 ‘휘청’ 할 규모의 큰 사고는 없었다. ‘마음’에 대해서는 차마 무사고라고는 하지 못한다. 나중에 글로 토로할 날이 올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되지 않는, 상흔이 제법 크게 남은 일이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한없이 절망했는데 쭉 그렇게 두지 않고 한 걸음 정도 물러나 마치 남의 일 보듯 거리를 두니 어떻게 또 버텼다. 다친 마음을 결코 경미하다 할 수야 없지만, 한 해를 돌이켜 어렵고 아픈 기억이 그것 하나면 ‘다행’이다.


조심해 친구!! 인생은 사고야!


오래전 영화 [후아유]에 나온 대사다. 정확히는 멜로가 형태(조승우 분)인 줄 모르는 인주(이나영 분)가 ‘지나가는 구급차를 보고 옆에 있던 친구가 울더라’는 얘길 하는 멜로에게 별이를 빌려 건넨 말이다. 인주는 사고로 청력을 잃어 수영선수를 그만둔 캐릭터였다. 명장면으로 남은 조승우의 기타 메들리도 물론 좋아했지만 나에게는 이 대사가 참 선명히 남았다. 지금 곱씹어도 인주의 경험이 낳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인생철학이란 생각이 든다.


다행 : [명사]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음


그러니까 올해 나는 운이 좋았다. 시소를 태운다면 조심보다는 부주의 쪽으로 기울었을 날들이었는데 비교적 무탈히 지나왔으니 말이다. 감사하다. 운빨이 내년에도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사고는 예고가 없고, 나는 아니라는 예외 규정은 더욱 없으니. 좀 더 신중히 살자고 다짐한다.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사고 가해자가 되는 일은 더욱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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