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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Jan 22. 2020

엄마의 이삿짐을 더 두게 할 수 없었다.

자책을 덜고 싶었다. 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도.

대청소를 했다. 큰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다. 주중엔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봐도 애써 모른 척하다 주말이 되면 먼지 한 점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움직일 수 없는 가구만 그대로 둔 채 거실 카펫까지 걷어가며 온 구석으로 청소기를 밀고 걸레질을 하는 게 본래 내 방식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대’ 자를 붙이게 된 데는 청소 ‘후’가 그 ‘전’과 비교하여 확연히 달라서다. 사실 전에도 비슷했을 텐데, 청소 후 말끔해진 지금 모습이 유독 새삼스럽기는, 꽤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계시는 동안에도 청소를 안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집안 전체를 헤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사가 복잡해진 때문이었다. 오래 함께 사시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지내시길 3년을 거의 채웠다. 건강하신 편이지만 연세가 있으셔서 올해 언니네와 합치기로 했다. 엄마 계시던 집을 내줘야 하는 날과 새 아파트 입주 일자, 언니네 집이 빠지는 날짜가 아귀가 딱딱 맞으면 좋았겠지만 어디 그러한가, 조금씩 어그러져 엄마와 언니 이사 사이 한 달 반이 떴다. 그렇다. 내 집이 엄마의 중간 경유지가 되었다.


새 아파트에 붙박이를 짜 넣었고 언니네 살림이 있으니 덩치가 큰 가구와 가전은 물론, 대부분 세간을 처분한다 하셨다. 가난이 습관이 되신 탓인지, 본래 물욕이 없으신지 원체 소박한 살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짐이 없다, 없다 하실 때 정말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참 생각이 모자라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이고 질 게 많은 것을,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보따리가 날라져 들어왔다. 작은 방은 어느새 엄마 누울 자리만 겨우 남기고 짐 위에 짐으로 채워졌고, 미처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은 거실 한쪽에 레고 블록처럼 쌓였다. 작은 방의 모든 권한과 책임은 엄마께 이임, 거실은 눈에 보이는 곳만 하는 둥 마는 둥 청소의 시작.


언니네 이사는 한참 남았으나 새 집 열쇠는 열흘쯤 후 받았다. 그래도 엄마 먼저 입주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엄마는 이사를 서둘렀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시던 날에는 용달차를 불렀었다. 내 냉장고가 너무 작아 엄마 쓰시던 것을 받기로 하여 냉장고를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나갈 짐에는 몸집 큰 것이 전혀 없어서 가족끼리 해결하자 했는데, 그게 발단이었을까. 시간이 날 때마다 언니와 나는 엄마의 이삿짐을 조금씩 날라야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옮기고 나면 바로 내 집을 떠나시겠다는 태세셨다. 그러나 결과는 이사도 아닌, 정착도 아닌 어정쩡한 생활이 한 달 반 꼬박 이어졌을 뿐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아 미리 옮겨 놔도 되는 물건도 있지만 단 하루여도 풀어헤쳐야 생활이 되는 물건들도 있다. 처음 쌓은 레고 블록은, 일부는 얼마 되지도 않아 내 집을 떠났고, 일부는 반쯤 허물어진 모양새로 남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매듭을 풀었고, 밖으로 나온 엄마의 살림살이들은 점점 제 자리를 넓혔다. 내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준다. 청소가 금방 끝나더라, 한 티도 안 나고.


언니네 이사가 마무리된 후 엄마의 ‘남은’ 이사를 했다. 먼 거리는 아니라지만 오고 가는 횟수를 줄이려고 차 뒷좌석까지 활용해 공간을 쪼개 봤으나 한 번은 더 움직여야 했다.


“나머지는 토요일에 해, 며칠 더 네 집에 둬. 괜찮지?”

......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고집을 부리......ㄴ 것은 아니었고 일부러 모두 연차 낸 날 끝내자는 가족 다수의 의견으로 당일 나머지 짐을 마저 옮겼다. 복잡해서 이상했던 이사가, 엄마와 한 달 반 함께 살기가 끝났다. 그 주 주말, 청소를 했고 집이 말끔해졌다. 마치 대청소를 한 것처럼.

 

결벽증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또는 엄마와 원수라도 진 딸인 줄 착각을 하려나. 엄마가 남도 아닌데, 사정이 생겨 잠시 함께 지내는 것이 뭐 엄청난 일이라고, 엄마 살림살이를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해서 며칠 더 두는 것을 못 참고, 그 짐이 빠지고 나니 집이 말끔해졌네 하는 꼴이라니. 이런 불효자식이 없다. 나, 이 글 욕먹을 줄 알고 쓴다.


그런데 변명을 하자면 내가 괜찮지 않은 지점은 마지막의 ‘괜찮지?’였다. 내 동의를 ‘컨펌’ 받으시겠다는 뉘앙스의 덧붙임. 처음이 아니다. 미리 내 의견은 묻지 않은 채 이미 당신 스스로 결정해 놓으시고는 꼭 그렇게 보험을 드셨다.


이 복잡한 이사 계획을 내가 가장 나중에 들었다. 어느 날 언니가 나 대신 화를 내주더라. 우리 집으로 우선 들어갈 것을 미리 나에게 얘기는 했느냐고. 엄마는 그제야 “그래도 되지?” 하셨다. 미리 말씀을 안 하셨어도, 더 나중에 하셨어도, 거절을 할 만큼 못 돼 먹은 딸은 아니고, 다른 대안이 없기에 싫다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동의를 구하는 것과 통보 후 접수를 확인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새 집 열쇠를 받으시고는 짧으면 열흘 길어야 3주를 넘기지 않으실 것처럼 하시더니, 4주째가 되는 성탄 맞이 가족 저녁 모임에서 언니네 이사 때까지 쭉 있어야겠다고 하셨다. 그러실 줄 알았으므로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어진 말이었다. ‘이제 민주네 집에 있는 것도 적응이 되고, 내가 보니까 민주도 나랑 지내기 적응이 된 것 같더라고” 뒷얘기는 마시지, 내게 먼저 물으셨으면 설사 불편해도 당연히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듣지도 않으시고는 장담하여 덧붙이는 것은 당신 마음 편하자고 하는 구실이지 않은가.


딸이라 거리낌이 없어서 그러시는 거라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한 번은 ‘더부살이’란 표현을 쓰시더라. 당연히 많이 놀랐다. 또 자주 미안하다 하셨다. 무척 불편했다. 내가 엄청 눈치 주는 딸인가 자책으로. 그런데, 정작 내게 먼저 상의하셔야 할 때 모든 절차를 건너뛰셨다. 그리하시고는 도장은 받아 두시겠다는 듯 ‘괜찮지?’라고 하시니, 정말 눈치를 보셨으면 한 번을 안 묻고 저렇게 확신하실 수는 없다는 마음과 너무 눈치를 보셔서 저 한 마디를 하시고야 마셨나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순간을 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이상한 이사와 동거가 끝나기를 바랐다. 엄마의 진짜 마음은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엄마가 (만약 그러하셨다면) 내 눈치를 보시는 것도, 나의 혼란도 일단락시키고 싶었다. 집이 아니라 내 마음을 청소하고 싶었던 것 같다. 조금은 말끔해졌을까. 자책을 이렇게라도 덜고 싶은 마음, 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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