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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Jun 05. 2022

당신에게도 닿을지 모를 오마주

영화 [오마주] 리뷰

“엔지니어라는 직업에 로망이 있었어요.”

공대로 진학한 이후, 남초 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진 여자사람인 경우가 잦아서 남자들은 받지 않는 질문, ‘왜 공대에 갔어요?’를 종종 받을 때마다 이렇게 답하곤 했다.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게 하기 위한, 전혀 진지하지 않은 일종의 말버릇이다. 영화 [오마주]를 보고 이 말이 생각난 건, 그래서 좀 느닷없긴 했다. “꿈꾸는 여자랑 살면 외로워진대”라는 대사가 가리키는 ‘꿈꾸는 여자’, 지완(이정은)과 닮은 데가 있나?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는데 어쩌다 ‘지구가 아파요’라는 슬로건에 마음이 뺏겨 환경공학자가 되겠다고 한 게 공대를 고집한 시작이었으니 로망 타령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아픈 지구는 쏙 빼고 겨우 엔지니어만 붙잡았지만 어쨌든 나도 ‘꿈꾸는 여자’인 적이 있었다.


세 편의 영화를 실패하고 또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되’인지 ‘돼’인지에서 막힐 만큼 진도가 안 나간다. ‘엄마 영화는 재미없다’는 팩폭을 서슴없이 날리는 아들과 ‘이제 직접 좀 벌라’며 생활비는 입금하지 않은 채 ‘밥 줘’만 외치는 남편, 지완의 삶은 발차기를 하지만 도통 제자리인 그녀의 수영과 닮았다. 이러니 ‘돈 되고 의미 없는 일’이 궁한데 ‘돈은 안 되지만 의미는 있는’ 제안이 들어온다. 지완은 한국 두 번째 여성 감독인 홍재원(김호정)-실존 인물 홍은원-의 영화 <여판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맡아 홍감독의 자취를 쫓게 된다.


영화는 60년의 간격을 두고 세 편의 영화를 찍은 1세대 여성 감독과 세 작품 후 다음을 고민하는 현재의 지완을 나란히 보게 한다. 여자가 편집실에 들어온다고 타박을 받던 편집기사 이옥희(이주실)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라고 물었을 때 지완은 “그때보다는요.”라고 답하지만 두 여성 감독의 상황은 사실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 홍재원은 친한 동료에게까지 딸이 있음을 숨겨야 했고 지완은 21세기에 여전히 가부장제 속 여성의 역할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때보다는요’만큼도 좋지 않던 시대에 ‘꿈, 열정, 인내심만으로는 되지 않을까’ 고민하면서도 결국 그 길을 간 선배는 지완에게 용기가 됐을 터다. 지완이 어떤 극적인 계기로 ‘꿈을 버리지 않겠어’라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각성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라진 필름의 흔적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자궁적출 수술 후 회복이 덜 된 몸이지만 좁은 계단을 힘들여 올라 영사실로 가는 장면과 찾은 필름이 얼마 되지는 않는다는 옥희에게 “찾은 게 어디예요!”라고 활짝 웃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복원한 필름을 함께 보는 중 옥희가 “자네는 끝까지 살아남아”라고 했을 때 지완이 띈 미소에 안도할 수 있었다.


영화는 지완이 <여판사>를 복원하는 과정과 별개의 사건을 하나 던진다. 공용주차장에서 자살한 여자가 그것인데 지완은 우편물이 쌓여가는 게 신경이 쓰이면서 옆집 여자가 죽은 게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나 영화 말미 옆집 여자는 돌아오고 지완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그저 예술인들의 이야기로만 관망하던 중 이 한 마디에 찌릿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 느낌이 날 만큼 ‘신수원 감독의 홍은원 감독에 대한 오마주-hommage 프랑스어로 ‘존경’을 뜻한다-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보편으로 나아간다. 복원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 지완은 주차장에서 마지막으로 홍재원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검열되어 삭제됐던 장면까지 드디어 복원되면서 홍재원의 부정된 자아까지 살아난 형체다. 그런데 이 그림자는 지완의 여정에 이따금 동행이 되면서 그녀의 꿈을 되살렸었다. 그리고 외로이 죽은 줄 생각한 옆집 여자도 살아온 것이다. 즉 영화는 홍은원 감독으로부터 김지완 같은 이 시대 영화인들에게, 나아가 삶을 견디는 모든 이들을 오마주한다. 지완의 “고맙습니다”는 한때 꿈이었던 것조차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엔지니어로 버티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로 들렸던 것 같다.


영사기가 아닌 뚫린 천장으로의 빛에 투사되는 필름들


인상적인 장면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완과 옥희가 함께 빨래를 걷을 때 빨랫줄에 걸린 하얀 이불 홑청에 둘의 실루엣이 그림자로 나타난 장면과 지완이 낡은 극장의 뚫린 천장으로 들어오는 빛에 필름을 하나하나 비춰보는 장면, 또 오래된 극장의 스크린과 관객석을 바라본 엔딩이 유독 그랬다. 그림자, 빛, 극장, 꼽아 놓고 보니 문득 이 영화, ‘영화’에 진심이구나 싶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이유만으로도 족하겠다. 솔직히 영화광은 아닌 나는 다른 이유로 개봉 첫날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이정은’. 어디선가 [기생충]과 비교가 된다며 배우가 아깝다는 평도 봤는데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반드시 쌍시옷이어야만 할 것 같은 소위 ‘(ㅅ)-센’ 연기가 종종 연기력의 기준이 되곤 하지만 ‘저 사람이 배우야?’ 싶을 만큼 힘을 뺏을 때 진짜가 나올 때가 있다. [오마주]에서 이정은 연기가 그렇다. 주부이면서 영화감독인, 그냥 김지완이다. 모든 컷을 책임지는 단독 주연으로서 그 몫을 다하고도 남는다. 더 다양한 결로 그녀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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