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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Jan 19. 2024

J가 P처럼 여행하는 이유

유행하는 MBTI 얘기를 해보자. 지인이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고등학생 때 처음 검사를 받았다. MBTI라는 말도 생소했던, 20년도 더 전이다. 10년쯤 지나 제 발로 찾아갔던 상담실에서 다시 한번, 그리고 또 10여 년이 흐르니 알다시피 흔하다. 그래서 결과는 줄곧 ISTJ. 그런데, 딱 한 번 재미로 하는 약식 검사에서 ISTP, J가 아닌 P가 나왔다. ‘어? 이럴 리가......’ 더듬으니 어느 문항이 J와 P를 갈랐는지 짐작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검사하며 그 문항만 답변을 바꾸니 ISTJ. ‘여행 갈 때 짐을 당일 아침에 싼다.’ 질문은 이것, ‘Yes’ 면 P, ‘No’ 면 J.


코로나 제약이 풀리면서 공항이 인산인해였다는 작년, 두 번 여행을 다녀왔다. 결국 인산인해에 보탬이야 됐겠지만 하늘길이 열리기만 기다려 작정한 여행은 아니었다. 하나는 마일리지 유효기간이 다 되어 곧 소멸된다기에 무작정 끊은 제주도 항공권이 시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가수가 도쿄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서 날아갔다. 굳이 닥쳐서 짐을 꾸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 정도면 적어도 여행에 있어서는 꼼꼼히 계획적이라는 J보다는 상황에 맡긴다는 P 쪽 같기도 하다.




대학 시절, 단기 어학연수 차 중국에 머문 적이 있다.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 ‘만리장성은 한번 봐야지,’ 한 게 첫 해외여행이었다. 일정에 맞춰 언니가 한국에서 날아왔는데 언니도 여행 초짜인 것은 마찬가지. 도시는 다르지만 나름 현지에서 알아보고 나섰는데 베이징 도착 첫날부터 문제에 봉착했다. 예약한 숙소가 남녀혼용 도미토리였던 것, 혹 누군가는 왜 문제인지 되물을 수도 있지만, 당시 그러한 숙박형태가 있는 줄도 몰랐던 우리는 그야말로 질겁했다. 짐을 풀지도 못하고 서로 당황한 눈빛만 한참 교환하다 결국 추가 비용을 내고 방을 옮겼다. 먹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양차이(香菜), 즉 고수를 두 사람 다 먹을 줄 몰랐으니 대부분의 중국요리가 그림의 떡, 알아뒀던 음식점은 아무 소용이 없이 몇 날 며칠을 맥도널드만 드나들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몇 년 뒤 작정하고 배낭여행을 떠나게 됐을 땐 엑셀부터 열었다. 칸칸이 나눈 시간에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는 물론, 교통편과 예산까지도 세세히 넣었다. 마땅히 숙박과 식당도 더 꼼꼼히 검색했다. ‘여행의 설렘은 본래 준비부터’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어서 표를 채우는 과정은 꽤 즐거웠다고 기억한다. 그렇다면 빈틈없는 계획표는 완벽한 여행을 선사했을까? 파리 개선문을 보고 발길을 옮길 참이었다. ‘앗! 수첩이 없다!’ 샹젤리제 거리를 말 그대로 미친년처럼 뛰어다녔다. 계획표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정신을 놓은 게지. 다행히 샌드위치를 사기 위해 들렀던 마켓에서 찾았는데, 수첩을 열어 보니 헤맨 몇 시간 놓친 일정은 유명한 맛집에서의 식사뿐이어서 오히려 살짝 실망을 했던 것 같다. 밥 한 끼에 미친년이 됐었다는 게 어이가 없었던 거다. 그날 저녁은 거기 마켓에서 적당히 요깃거리를 사서 해결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내내 스스로를 괴롭혔던 으뜸은 엄마를 모시고 초등학생 조카 둘을 데리고 갔던 일주일 남짓 스페인 여행이었다. 피할 길 없이 보호자가 됐으니 부담은 당연했지만 아주 사소한 틀어짐에도 날이 섰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과했으면 여행 중반 몸에 이상이 왔을 정도였다. 결국 어느 날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계획에 없던 크루즈에 모두를 실었다. 태우거나 탄 게 아닌 ‘싣다’였다. 그렇게 옴짝달싹 못할 바다 가운데에 피보호자들을 안전히 가둔 데다 보호자인 나 역시도 갇히니 굳이 할 게 없어졌고 그제야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날 오후 본래 계획이 뭐였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사람 성격 어디 가겠나. 누가 J와 P의 차이는 계획을 세우는지 여부가 아니라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견디지 못하느냐, 그런가 보다 하느냐라고 하더라,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나의 여행 방식은 엄밀히 학습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견디지 못할 상황을 최소화하려는 방어기제랄까. 앞서 말한 상황 말고도 계획대로 순탄할 리 없다는 건 여러 번 실제 여행에서 경험했다. 그리고 그 횟수만큼 그대로 되지 않아도 여행은 진행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돌아보면 별일이 아니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게 곁길로 빠졌을 때 더 행복한 순간을 맞기도 한다는 것도 함께 배운 점이다. 그렇다면 계획이 빗나갈 때마다 당황해 어찌하지 못하고 괴로울 바에는 어긋날 계획 따위 애당초 만들지 말자. 그래도 여행은 ‘잘’ 흘러갈 것이다.


작년 두 번의 여행은 학습의 잘 된 적용이었다. 호텔만 예약한 채 제주 비행기에 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보통 호텔만 정한다고 해도 동선을 고려한다고 대략 어디를 갈지 따지는데 여차하면 호텔에서 갈 수 있는 곳만 가자는 심산으로 그마저 안 했다. 그런데 제주도 뚜벅이는 처음이었음에도 여느 불편 없이 사흘을 알차게 보냈다. 스마트폰과 잘 구축된 대중교통 덕이긴 했다. 그래도 진짜 정보가 없어서 우왕좌왕한 시간이 없진 않았는데 어느 정도 헤매 줄은 각오해서인지 그쯤은 불편하다 느끼지 못할 만큼 마음이 느긋했다. 도쿄의 경우는 공연장이 외곽이라 시내 여기저기를 다니기가 애매해 보였다. 그런데 콘서트라는 목적만 분명해서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2박 3일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한 번 겨우 했는데 식도락 여행을 온 게 아니다 보니 이것도 대수가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 관광지에 들르고 맛집을 찾아다녔으면 어찌저찌 SNS용 사진은 몇 장 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연에 늦지는 않을까 계속 시계를 보면서 아등바등 조바심을 냈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렴 백지상태로 가길 잘했다.


그래서 무계획이 상팔자? 그렇다고만은 못 할 것이다. 준비가 허술하면 당연히 놓치는 것도 있고 또 낯선 곳에서 오히려 불안할지도 모른다. 다만 엄격한 계획 속에 스스로를 가두느니 그만큼의 아쉬움은 감내하고 그 정도의 불안은 설렘으로 간주하자고 다짐한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계획을 더 철저히 짜는 건 어떨까? 예상대로 모든 미션을 클리어했을 때 뿌듯하기는 했다. 그런데 여행을 통해 받고 싶은 보상은 어떤 ‘보람’이 아니라 ‘쉼’이다. 말 그대로 여행이니까, 숙제가 아니라. 타고나길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는 사람이 여행은 즉흥에 맡기는 이유다. 결국 ‘여행 목적’에서 벗어나길 바라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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