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앞둔 금요일 퇴근길, 우편함에 봉투가 하나 있었다. 내용물은 전통공예 노리개와 Y의 연하 메시지.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물론, 소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접 걸음을 한 수고가 정말 감동이었다. ‘그래, Y는 이런 친구였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따뜻함을 건네는 사람.’ Y를 처음 만난 지는 십오 년이 지났지만 관계가 쭉 이어온 건 아니다. 그녀의 결혼식을 마지막으로 접촉이 끊겼다가 올해 초 이사하면서 가까워진 핑계로 연락을 취했으니 아마도 6,7년 만이었지 싶다. 그렇게 오랜만에 문자를 보내기에 머뭇거림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영영 끊어지게 둘 수 없다는 의지가 더 컸다. 선물 때문이 아니라, 그러길 잘했다.
대학원에 입학해 내리 3년 연구실 홍일점이었고 박사 2년 차가 됐을 때야 겨우 여자 후배가 한 명 들어왔었다. 남초 사회 속 여자여서 좋았던 점을 한둘도 꼽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무거운 짐은 거의 들지 않았다-, 그 반대는 열 손가락 채우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게 씁쓸한 지점이다. 연구와 상관없이 은근슬쩍 잡무들이 맡겨졌고 소수여서 두드러지거나 소수여서 존재감이 사라졌다. 예를 들면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행사에서 구성원이 아닌 당연히 누군가의 와이프로 오해하는 상황들이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 또 여학생들 외모품평회를 고스란히 같이 들어야 하는 등, 그야말로 불쾌한 자리도 당시엔 흔했다. 남녀 편가르자는 건 아니고 다만 동성의 동료가 꽤나 간절했다는 말이다.
Y는 입사 후 첫 부서에서 그 간절한 여자 동료였다. 유일한, 그러니까 Y에게 나도 유일한, 나보다 반년 먼저 입사했는데 내가, 즉 여성 경력이, 온다는 소식에 출근하기만 손꼽았다고 했으니 서로에게 그렇게 간절했다. 그래서 나이나 직급도 아무 걸림이 되지 않고 처음부터 탐색전 따위 없이 가까워졌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연대 같은 시작이었는데 그 이상이 되어 주말에 회사 밖에서도 가끔 만날 만큼 친했다. 함께 초록색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춰 입고 뮤지컬 <위키드>를 보러 갔었던 게 기억이 난다.
요즘은 여자 엔지니어들이 꽤 있는 편이다. 여전히 적은 쪽이지만 한 차수에 하나둘씩 꼬박이더니, 한번은 여자들만 모인다고 해서 간 회식이 상당히 북적거려 도리어 놀랐다. Y와 단둘이 “버텨 보자”면서 꾸역꾸역 밥을 삼키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세상 무서울 게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여전히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어 잠자코 듣다 생각했다. 저들에게 선배로서 좋은 롤 모델일까. 어떤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Y를 떠올렸다. 한참 차이가 나는 지금 후배들에겐 이미 동떨어진 존재라 이런 부담감이 오히려 무색해도, 앞서 커리어를 쌓는 여자 동료로서, 겨우 한두 발이지만 그래서 더 그녀에겐 어떤 길잡이가 되어야 했는데 그땐 그런 고민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병가를 냈다고 했다. 내가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긴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마음의 병’, 가슴이 저릿했다. ‘힘들었구나.’ 새삼스럽게 반응하는 스스로가 ‘좀 별로’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부서를 옮기기 한참 전부터 Y가 버거워하는 줄 몰랐다고는 못하니깐. “Y는 너를 선배, 언니, 그 이상으로 의지해.” 언젠가 누가 한 말이 떠올랐고 연대 어쩌고 한 게 민망할 만큼 나 살기만 급급했구나 싶어 낯이 뜨거웠다. Y는 복직 후 머지않아 퇴사했다. 청첩과 함께 온 소식이었으니 병가의 연장선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해도 축하만 하게도 안 되었다. 병가를 낼 때도 퇴사 인사를 나눌 때도 Y는 그간의 얘기를 구구절절하지 않았다. 보통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괜찮다. 반대의 경우 오히려 괜찮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법, 말이 길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올초 오랜만에 Y를 다시 만났을 때 여자들끼리의 회식 이야기를 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누구보다 너에게 좋은 손위가 되어 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고, 완벽한 본보기커녕 사소한 요령마저도 전수해 줄 만한 게 없었어도, 다만 한두 번 방향을 제시해 줬더라면 아니 아주 가끔 한두 개 화살만 막아주기라도 했으면 네가 좀 더 회사 생활을 지속하진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웃었다. 당시 힘들었던 건 맞지만 그저 자기와 좀 안 맞는 곳이었을 뿐, 따라갈 모델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그 미소에 미세하게라도 원망과 후회가 담겼을까 마음이 쓰였다.
좌)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 우) 탁월한 Y의 누비 작품
Y의 연하 엽서에는 그녀가 다니는 공방의 전시 안내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오후, 그녀의 작품만 슬쩍 보고 올 요량으로 찾아갔다. 크지 않은 카페가 전시된 공예품으로 화사했다. 가까이 보니 역시 공예의 본질, 바느질의 정수가 보여 감탄했다. 영업 중인 곳이라 구경만 하고 갈 수 없어 자리를 잡았는데 누가 Y와 같은 엽서를 내밀었다. 직접 홍보에 나선 공방선생님이셨다. Y를 자연스럽게 언급하게 됐는데, Y는 누비(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죽죽 지게 박는 바느질, ‘누빔’의 규범 표기)에 있어서는 독보적으로 잘한다는 칭찬에 입이 마르셨다. 여러 작품 중 그녀의 것만 누비여서 독특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취미 수준을 넘은 탁월한 전문가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땀, 한 땀이 정말 예술이었다. 몰래 다녀가려던 생각을 접고 ‘찬탄’의 메시지를 보냈다. 쑥스러운 표정의 이모티콘과 함께 온 Y의 답,
“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별거 아닌 문장이 이마를 때렸다.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는 것만이 살아내는 방식이 아닌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그녀의 선택을 왜 벗어난 결과로만 생각했는지 나의 좁은 시야가 부끄러웠다. 우리가 동료였을 때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래서 미안함은 진심이지만, 지금 그 마음으로 그녀를 재단할 것은 아니다. 너무나도 멋지게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연대해야 한다면 서로의 삶을 각자의 자리에서 응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내가 후배들에게 좋은 롤 모델이 돼야 한다는 부담이 필요하다면 그 또한 내 자리에서 내 역할을 성실히 해 내는 것이지 않을까. 이런 깨달음, 노리개 이상의 선물로 크리스마스가 더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