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부, 강근 형 (눈물의 첫 인터뷰)

2025년 가을 글쓰기모임 결과물.

by asbubam

2025년 10월부터 12월까지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다. 좋아하던 작가님이 진행하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이었는데 많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운 좋게 뽑혔다. 다들 정말 글도 잘 쓰시고 말씀도 잘하셔서 모자란 내가 부끄러울 때가 많았지만 에세이를 쓰고, 생각을 말하고, 합평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온전히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는 마음공부도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용기 내서 참여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했고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제출했던 결과물 `나의 사부, 강근 형` 을 브런치에도 공개한다.



나의 사부, 강근 형


눈물의 첫 인터뷰

“제가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보다 더 잘할 수 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왜인지 푹 숙인 고개 아래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근 형한테 빌려 입은 회색 정장 바지에 눈물자국이 크게 번져갔다. 2002년 6월 말 XX 컴퓨터 학원 지하 강의장이었다.


XX 컴퓨터 학원은 당시에 취업률 100%를 보장하는 개발자 양성 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해당 과정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학원의 프로그래밍 언어 단과 과정을 필수로 수강해야 했다. 4,6개월의 취업대비 과정은 `고급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필기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수강생만 고급반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고급반 면접은 열댓 명 정도의 필기시험 통과자가 2열 종대로 앉아서 단체로 진행했다. XX 컴퓨터 사장 겸 XX 학원 원장이 그 끝 가운데 앉아 이력서를 한 장씩 넘기며 이야기하는 형태였다.


한 명, 한 명 지원자의 이력서를 넘기며 피드백하던 사장은 내 이력서를 보고 말했다. “이승우 씨. 필기시험을 잘 봤네요. 그런데 고졸이네요. 이승우 씨가 고급반을 졸업하고 고졸이라 취직이 안 돼서 학원 취업률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죠?” 깔끔해 보여야 한다고 블루클럽에서 하얗게 밀렸던 구렛나룻이 아까워서였을까? 그동안 고생했던 반년의 시간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발끈해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여기 있는 모두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안되느냐고 소리쳐버린 것이다. 옆에는 단기 과정을 같이 듣고 필기시험에 합격한 같은 반 형들이 주르륵 앉아 있었다. 매일 수업 전에 만나서 함께 스터디를 했던 형들이었다. 그 뒤로 사장이 나에게 뭔가 세상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다시 다음 지원자, 그다음 지원자의 이력서를 읽으며 한참 피드백을 이야기했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 소리만 귀에 맴돌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퉁퉁 부은 내 눈을 본 강근 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흐흐. 별수 없어 대학 가야지.” 형은 광화문 교보에 나를 데려가서 그동안 갖고 싶어 했던 비싼 전공책을 몇 권 사줬다. 그리고 김밥을 사주면서 뭐라고 한참 말을 했는데 그냥 김밥이 맛있었던 기억만 난다.


강근 형

진강근 형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봄이었다. 강근 형은 개발자, 개발자 지망생들이 모이는 IRC라는 채팅 플랫폼에서 만났다. 진주 출신인 강근 형은 산업기능요원을 준비하면서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서울로 올라왔고, 고교 동창인 수현이 형이 재학 중인 홍대 앞에서 둘이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수현이 형과 온라인에서 친하게 지내던 내가 2002년 초 그 둘의 자취방에 놀러 갔다가 “너도 여기 와서 같이 살래? 설거지랑 청소하면 재워줄게.”라고 농담처럼 한 말에 다음 주 짐을 싸 들고 내가 합류하면서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고교 시절 시작된 내 청춘의 전부는 펑크 밴드였다. 나름 실력이 괜찮아서 클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나중엔 작은 언더 기획사에도 소속돼서 홍대 앞 클럽씬에 꽤 알려졌었다. 뜨거웠던 시기도 잠시 밴드가 해체되고 막막한 미래를 헤매던 중에 좋아하던 컴퓨터를 업으로 하는 개발자를 다시 꿈꾸게 됐다. 혼자서 어떻게든 자료를 찾아보고 학원도 다녀보고 했는데 취업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군입대도 다가오고 있었다. 아지트 같은 자취방에서 하루 종일 두꺼운 전공서를 놓고 단련하는 모습이 어린 나이에 멋있게 보였고 어쨌든 혼자서 하는 것보단 선배들이랑 같이하면 더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집에는 형들이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공부도 시켜준다고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다고 설득해서 부랴부랴 짐 싸들고 나왔다.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이라 바쁜 수현이형보다 학교를 휴학하고 다가오는 군입대와 산업기능요원이라는 목표를 배수의 진으로 놓고 달리는 강근 형과 더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근 형의 지론은 이랬다. “우리는 남들 공부할 때 겁나 놀았잖아. 그래서 지금 죽어라 두 배, 세 배, 열 배 공부해서 병특을 해야 따라잡을 수가 있어. 안 그럼 군대 가서 더 뒤처지는 거야!” 산업기능요원은 병역특례, 줄여서 병특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군대를 가는 대신 국가가 지정한 산업체에서 3년의 기간을 대체복무로 인정해 주는 제도였다. 물론 한 해에 병특이 가능한 인원은 지원자 대비 몹시 한정되어 있었고 경쟁 또한 치열했다.


한 살 터울인데도 항상 자신만의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강근 형이 그때는 산처럼 크게 보였다. 무협영화에 나오는 사부처럼 생각하면서 따르다 보면 나도 원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형이 짜주는 스케줄에 맞춰 함께 수행하기 시작했다. 형은 당시에 XX 학원에 먼저 다니고 있었고 나는 단기 과정을 듣기 전에 필요한 기초 공부를 아지트에서 하루 종일 했다. 학생 때는 의자에 앉아서 30분도 집중하지 못했던 나였는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환경이 감사해서였을까? 형이 학원 가면서 내주고 간 숙제를 마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매일의 일과였다. 예를 들면 <C언어 21일 완성>이라는 책이 있으면 `우리는 여태 놀았으니까` 논리에 의해서 3일 만에 완성해야 하는 식이었다. 아니, 이게 될까? 싶었는데 매일 저녁 왜 못했는지 이유를 말하고 혼나다 보면 그게 된다. 됐다. 어느새 모든 21일 완성 책을 3일 만에 보기 시작했다.


2002년 6월은 한/일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시기다. 다들 광화문과 시청의 열띤 응원을 기억하는 그때에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웅성이는 홍대 앞 응원 소리를 들으며 숙제해야 했다. 한국 시합이 있을 때는 강근 형이 맥도날드를 사주고 TV 시청을 허용했다. 살면서 이렇게 뭔가를 열심히 해봤던 적이 없었다. 물론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만큼 강한 의지로 공부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개발자가 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형처럼 나도 병특을 준비하게 됐다. 기초 공부를 충분히 했다고 판단해서 중급 단기 반을 바로 들어갔다. 같은 반 형들은 지난달 있었던 기초반을 수강하고 왔는데 수업 때마다 선생님의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하던 나를 신기해했다. 형들은 내가 지난 6개월간 어떤 시간을 보내고 여기에 있는지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그랬을 것 같다. 고급반을 준비하는 형들이랑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학원에 스터디 공간이 있어서 매일 수업 전에 모여서 예습/복습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학원 수업은 7시에서 9시까지 2시간, 스터디는 수업 전에 2시간 정도 했다. 물론 이때도 나는 아침 6시에 강근 형과 함께 학원으로 출근해서 스터디 전까지 예습하고 스터디 끝나면 강근 형이 끝나는 11시까지 같이 공부하고 집에 가서 씻고 자는 그런 생활을 매일 했다. 형들은 스터디를 주도하는 내가 신기했겠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아! 1시간짜리 공부를 5시간, 10시간 하다 보면 나 같은 돌머리도 이해할 수가 있구나! 시간을 이기는 건 없구나!’


당시에 가정형편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이전에 밴드 할 때는 PC방 알바를 해서 생활비를 마련하고는 했는데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라 넉넉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손을 빌려야 했다. 단기 과정 학원비는 40만 원이었는데 공중전화에서 학원비를 지원해 줄 수 있을까? 하고 엄마한테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먹고 자는 건 형편에 여유가 있었던 강근 형이 전부 지원해 줘서 밥은 굶지 않았는데 멀쩡한 티셔츠가 한 벌이라 가끔은 아직 덜 마른 티셔츠를 지하철에서 말리면서 입고 학원에 가던 생각이 난다. 치열했다면 치열했던 시기였다. 독기가 있었고 처음 집중해 본 공부가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다음에 뭘 말할지 예상이 되는 그런 기분을 처음 경험했다. 나도 하면 되는구나! 하고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다.


그렇게 다음 달 고급반 필기시험을 보고 한 문제를 틀렸던 듯하다. 만점에 가까운 점수였다. 이제 고급반을 수강하고 4개월 뒤면 산업기능요원이 된다는 생각에 자신 있게 들어간 면접장에서 내 눈을 똑바로 보고 고졸은 안된다는 사장 이야기에 그 모든 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나를 소리치게 만들고 눈물 쏟게 했던 거였다. 물론 20여 년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면 이불킥 하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내 노력이 너무 크게 생각됐고 알아봐 주지 못하는 사장이 아쉬웠다. 다른 건 몰라도 거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인터뷰 그 후

인터뷰가 끝나고 형들이 찾아와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해줬다. “승우. 너 열심히 한 거 우리가 다 알아. 너 꼭 대학 가면 좋겠다. 아직 어리니까 꼭 대학 가서 다시 도전해 보면 좋겠다.” 하고 따뜻하게 이야기해 줬다. 한 달이지만 다들 큰맘 먹고 공부를 시작한 만큼 전우애가 쌓였던 터였는지 너른 맘의 형들이 나를 위로해 줬다. 다음 달 7월 나는 아지트를 떠나 본가로 돌아왔다. 또 부모님께 손을 벌려 재수학원을 등록하고 4개월 대입 준비를 해서 수능을 봤다.


재수학원을 다닐 때 강근 형이 나를 딱 한 번 불렀다. 같이 공부할 때 바다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나한테 바다를 보여준다고 차에 타라고 했다. 진주까지 내리 네다섯 시간을 달려가서 보여준 바다는 큰 파도가 치는 부둣가의 검은 바다였다. 내가 생각하는 푸른 바다가 아니었다. 형은 이게 진짜 바다라고 하면서 황당해하는 나를 경상대 도서관으로 데려갔다. 3일 동안 얇은 기초 영문법 책 2권을 다 읽게 했다. 투덜투덜 대면서도 결국 다 읽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점수가 바닥이었던 수리 영역이 아닌 유일하게 언어/외국어 영역 점수만으로 지원가능했던 한성대 컴퓨터공학과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XX 학원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던 해 다시 지원했다. 사장은 나를 기억했다. “이승우 씨. 이제 대학생이 됐네요. 얼마나 좋아요?” 하고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그때는 이렇게 돌아 돌아오게 만든 사장이 스무 살의 나를 눈물 쏟게 한 사장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살면서 꼭 좋은 기억을 준 사람만이 도움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첫 인터뷰를 눈물바다로 만들게 했던 사장에 대한 원망스러움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눈물의 인터뷰 이후 대학에 입학한 덕분에 학사 병특에 지원해서 합격했고 3년의 개발 경력을 쌓았다. 병특했던 회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병특을 마치고 결혼해서 함께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병특회사 역시 먼저 입사한 강근 형의 추천이었다. 입사를 위해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말 안 해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여러 번 이직도 했지만 여전히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물론 다른 일들처럼 개발에도 재능은 중요하다. 그런데 시간과 노력의 축적이 가끔 재능보다 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강근 형에게 개발을 배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난 시절을 돌아보다 보니 인생을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풀어나가면 되는지 나라는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모르게 강근 형과 함께 공부했던 시간이 살아가는 데 꽤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개발하면서 후배들을 만나고 성장에 대한 고민을 듣고 조언을 해줘야 할 때가 가끔 있다. 그때마다 강근 형과 함께 공부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안되면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다 보면 시간은 좀 걸려도 언젠가는 되더라고 이야기한다. 어렵게 개발자가 된 경험은 일을 하면서 단단하게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지나 20년을 쉬지 않고 일했더니 몸과 마음이 지쳐 지난봄 4년 넘게 다녔던 회사를 퇴사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충분히 회복되어서 다시 개발자 구직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회사에 지원하기에 앞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었나? 왜 개발자가 되고 싶었나? 그 처음을 회상해 본다. 덜 말라 축축한 티셔츠로 새벽 지하철에 오르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했던, 감정이 북받쳐 인터뷰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했던 열정과 개발자라는 직업을 동경했던 그 마음을 기억한다. 다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오랜만에 강근 형한테 밥이나 사달라고 연락해야겠다.




에필로그

글쓰기 모임의 `여행에세이`, `리뷰에세이`에 이은 마지막 주제는 `자유에세이`였다. 어떤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 요즘 특히 많이 생각나는 강근 형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이전에도 트위터에 짤막 짤막 강근 형 이야기를 쓰곤 했는데 개발을 쉬고 있는 지금 형에게 개발을 첨 배웠던 때가 특히 많이 생각났다. 살면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몰두했던 때를 떠올려 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그 시기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글은 생각보다 술술 써졌다. 수업 처음에는 문단을 어떻게 나눠야 될지도 모르고 쉼표가 덕지덕지 만발하고 엉망이었는데 작가님, 수업을 함께 들었던 동료들에게 리뷰받으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이 만큼 쓸 수 있게 된 게 어딘가 하고 감회가 새롭다.


휴직에 이어 퇴사를 하고 반년 넘게 `독립일기` 를 연재해 오다가 3개월 만에 쓴 글이 글쓰기 모임 에세이 결과물이 됐다.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해서 항상 12시를 훌쩍 넘어 끝나던, 짧지만 농도 깊었던 글쓰기 모임 결과물을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고 이 글이 어쩌면 그동안의 긴 휴식과 그 결과를 표현한다는 생각도 있다.


나의 독립일기가 `다시 구직을 시작한다.`라는 싱거운 결말로 끝나버리는 건가? 싶기도 하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나는 지금 어떠한가?`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다. `나는 이제 괜찮은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고 생각한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달라졌다.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도 단련되는 것인지 몰라도 스스로가 단단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쉬는 동안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여행도 많이 갔고, 목공을 배워보고, 글쓰기 모임, 달리기 수업에도 참여했다. 한 달에 100km 넘게 달리고 1시간 30분을 멈추지 않고 뛸 수 있게 됐다. `생각할 시간도 없구나!` 하고 살다가 이제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나 스스로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변화한 나`를 세상에 한번 더 던져 놓아보고 싶다. 같은 자극을 받을 때 어떻게 대응하게 될지 어떻게 세상에 부딪혀 나갈지 궁금하다.


오랜만에 첫 독립일기를 읽어봤다.



그러다 회사 동료랑 미뤄왔던 티타임을 하던 중에

니체가 "위험한 인생을 살아라."라는 말을 했다며 들려준 이야기에 마음을 쉬이 정할 수 있었다.

"우리 안에 방어기제가 이미 충분히 발휘되고 있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사실은 이미 충분히 방어된 상태여서 실은 하나도 위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위험을 선택해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완벽하게 문장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정했다.

그만둬야겠다. 봄이 되기 전에 그만둬야겠다. 하고...



첫 독립일기를 쓰고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뒤 나에게 `위험한 인생`이란 `다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되었다. 쉬는 동안 너무 즐거웠다.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백수가 체질인지 질리지 않고 재미있는 것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것이 SecondB.ai 서비스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경험이었다. 퇴사 전 여행에서 처음 나 스스로를 위해 개발을 시작했던 SecondB.ai가 이제 곧 가입자 1,800 명을 앞두고 있다. 개발을 처음 배웠던 그때 그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즐거운 일을 업으로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다시 마음의 병이 찾아오진 않을까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 스스로도 완전히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마음 한켠에 감춰두고 싶을 정도의 작은크기로 존재감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안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좋은 사람들이랑 더 해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달려보니 `나 꽤 강한 사람이니까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글을 쓰니까 기분이 좋다. 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글쓰기를 주르륵 달린 기분이다.

계속 써야겠다. 계속 달리고.


지금까지 혼자서 가장 멀리 달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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