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낙서

아빠와 김치 김밥

일상 낙서 | 어느 날의 일기

by Two of us

배달의 민족 에디터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쓴 글이 아까워 내 브런치에라도 올려본다. 과제의 주제는 '가장 좋아하는 것을 소개해주세요.' 였다. (사실 내용이 조금 어두워 많이 바꿔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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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김치 김밥



엄마와 싸울 때 상황이 불리해지면 나는 늘 옛날 얘기를 꺼낸다. 일종의 복수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방어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 시절 엄마는 그다지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유하지 못했고, 더 어렸을 때는 가난에 치를 떤 소녀였으며,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사랑에 목말랐던 아이였다. 도피처로 택한 결혼은 엄마의 생각만큼 단단한 울타리가 되지 못했고, 그럼에도 살아야 했기에 그 안에서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살아 내리라. 버텨 내리라. 가끔씩 해주는 -사실 여러 번 들었지만- 엄마의 그 시절 이야기는 그때 세상에 없던 나도 이를 갈게 할 만큼 견고한 다짐의 집합체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나에게 나눠줄 만큼의 사랑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다. 여유는 사치였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눈썹 끝이 하늘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지금 와서 그때 엄마가 산후 우울증이었노라 고백을 들었지만, 그 어린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항상 날이 서 있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던 엄마 대신 아빠의 품에 안기곤 했다. 그럼 아빠는 허허거렸다. 아빠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과 다른 어른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여하튼 그 땐 그랬다.


그렇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 역시 유년 시절에 있다. 아이의 마음엔 기쁨과 슬픔을 서로 희석시키지 않는 순수함이 있기 때문일까. 떠올리면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 기억이다. 당시 우리 집은 1층이 공판장, 2층이 주거지인 다가구 주택이었는데 거실과 부엌의 구분이 딱히 없고, 열어 둔 대문으로 이웃집 TV 소리가 들릴 만큼 협소했다. 어느 날은 늦게 귀가하는 엄마를 대신해 아빠가 밥을 해주어야 했는데 "김치 김밥 해줄까?"라는 한 마디에 굉장히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김치 김밥은 아빠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사실 조미김에 김치 한 조각을 넣고 말아 만든, 요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음식이지만 나는 그걸 좋아했다. 싱크대 위에 둔탁하게 도마를 올려놓고 김밥을 마는 아빠 뒤에서 나는 무릎 나온 내복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만든 즉시 입에 넣어주는 김밥에는 조미김의 짭조름한 맛과 밥알의 뜨거운 단맛, 김치의 차가운 감칠맛이 맴돌았다. 그중 최고는 애정의 맛이었다. 두터운 손으로 조그마한 김을 돌돌 말아 채 식지 않은 밥을 후후 불어 입에 넣어주면 그걸 우걱우걱 씹으며 더 신나게 날아올랐다. 부엌과 거실과 대문의 공간이 협소해서, 오히려 어느 곳에 서있어도 바깥의 풍경이 잘 보이는 밤이었다. 열어 둔 대문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고 까만 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빠는 만족한 듯 웃었다. 행복하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엄마는 다시 아이가 되었다. 때때로 그녀에게 눈썹 위로 검지손가락을 가져가 한 컷 치켜세우며 옛날 엄마의 모습이라며 장난을 친다. 이건 사실 장난이라기보다 개구리가 맞을 만한 돌에 가깝다. 이 장난을 할 때면 엄마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나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부러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못돼고, 이기적이고, 촌스럽기 때문이다. 자기연민은 우리 집안의 전통이다. 내가 엄마의 가슴에 낸 생채기는 백 서른여덟 개쯤은 가뿐히 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내게 가장 소중한 순간을 만들어준 아빠가 엄마의 불행한 시절에도 일조했다는 것쯤은 이제 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가장 좋아하는 것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덜컥 이 메뉴가 생각나 버린 걸까. 왜 아빠를, 이 김치 김밥을, 그때의 그 맛을 평생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걸까. 확실한 건,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기쁨과 슬픔이 서로 희석된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것이 계속 좋아하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는 것을 아는 허름한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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