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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고 싶어요.

산티아고 일기 | Day 0

by Two of us



집에 가고 싶어요

19.09.03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길 출발 하루 전, 그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소리다. 근데.



집에 가고 싶다. 한국에 두고 온 엄마가 생각난다. 아픈 엄마를 외면한 채 비행에 오른 나를 누군가 책망이라도 하듯 아프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애써 먹을 것을 입에 넣어보아도 삼키는 것이 곤욕이다. 정말 이 길을 걸어도 되는 걸까.



생장*에 가기 전 머물 파리 호스텔을 예약했다. 혼성 8 배드라고 했다.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3 배드였고 원래 내 자리라고 안내받은 침대에는 이미 남자의 옷가지가 널려있었다. 알고 보니 두 명의 남자가 -신발만 있었지만 족히 300은 되어 보였다- 배정되어있었고 그 사람들은 아무 데나 옷가지를 벗어놓을 만큼 자유분방한(?) 사람들 같아 보였다. 호스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냥 남은 침대를 쓰라고 말한 뒤 나가버렸다. 그러니까 건장한 유럽 남자 둘과 나 하나. 심지어 침대 바로 앞이 샤워실이다. 무서워하지 않고 잠들 수 있을까?



도저히 편치 않을 듯했다. 방을 옮겨달라고 했다. 호스트는 예약이 다 찼다고 했다. 나는 혼성 8 배드를 예약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그렇다면 남자 7명이 있는 곳으로 옮겨줄 수 있다고 했다. 혹은 나와 같은 Chicken(겁쟁이)이 있다면 같은 방을 쓰게끔 도와줄 수 있다고도 했다. 말발이 딸려 더는 말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어쩌겠는가. 혼성에 여자가 나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 게 실수다. 결국 13만 원짜리 다른 호텔룸을 급히 구했다. 그곳은 언제 배드 버그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허름한 곳이었다. 침대에 누워 여행이 이대로 괜찮을 지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섣불리 결정했던 것은 아닐까.



자궁의 습격

19.09.04 새벽




고난의 연속이다. 생리가 터졌다. 새벽 3시에 아랫배에 싸한 기분을 느끼며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달밤의 빨래쇼를 했다. 내일 피레네산맥을 넘을 수 있을까?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이대로는 무리인 듯싶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리손까지 택시를 탈까. 오리손부터 택시를 탈까. 다른 루트로 갈까. 이런저런 걱정으로 아침을 보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지나친 걱정은 화를 부르는 법. 다른 방법을 찾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가야 할 시간을 놓쳐버리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무거운 가방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낙오. 그렇게 버거워하던 가방을 액세서리처럼 끌고 축지법 신공을 펼친 덕에 가까스로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번엔 게이트를 못 찾겠다. 남은 시간은 7분. 이미 정신을 잃은 나에게 전광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면 아무나 닥치고 익스큐즈무아를 외쳤다. 결국 출발 3분 전, 가까스로 탑승에 성공했다.



하.. 남들은 쉽게 간다는 생장이 나에게는 너무 멀다. 내 피에 맞지 않는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질 않는다. 나, 잘할 수 있을까?




*잠깐 산티아고 상식!


-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가장 많이 걷는 코스는 아래와 같다.


1. 프랑스길 : 약 800km를 걷는 가장 대표적인 코스로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하여 피레네산맥을 지나 스페인 산티아고로 이르는 길이다.

2. 사리아 : 프랑스길을 따라 걸으면 중간중간 큰 도시들이 나오는데, 그중 사리아에서 시작하는 코스. 약 100km를 걷는 코스로 순례길 증서를 받을 수 있는 최소 거리이기 때문에 장기간 순례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시작하곤 한다.

3. 포르투갈길 : 프랑스길의 반대편 길로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로 이르는 길이다. 프랑스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순례자들이 걷는 루트로 해안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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