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이트 스카이

죽음은 어떻게 면죄부를 발부하는가

by 박현신

조지 클루니의 연출작 <미드나이트 스카이>(이하 미드나이트)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SF 드라마쯤으로 여기고 지나갔을 것이다. 짧게나마 글을 남기는 것은 오롯이 그 장면 때문이다.

<미드나이트>는 평범한(또는 진부한) 영화가 될 법했다. 그동안의 영화가 보였던 단점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지구의 이야기와 그 사실을 모른 채 목성에서 귀환하려는 우주선의 이야기를 담는데, 두 개의 시간을 연결하는 연출은 정교하지 못하다. 양자의 시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우연에 기댄다. 튼튼했던 빙하는 하필 오거스틴(조지 클루니)와 아이리스(킬린 스프링올)이 진입하는 날 녹아내린다. 설리(펠리시티 존스)와 오거스틴이 하필 접촉에 성공했을 때 시스템의 고장으로 통신이 두절된다. 사건이 정교하지 않게 결합되어 있고, 그것은 메시지를 위한 연출자의 선택이라는 점은 기존 영화가 보였던 약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모든 사람이 대피했을 때 오거스틴은 북극 기지에 남는다. 그곳에서 홀로 지내던 오거스틴은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아이를 발견한다. 오거스틴은 아이에게 말을 건네지만, 아이는 오거스틴의 말에 반응만 할 뿐 말을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아이는 도화지에 아이리스를 그린다. 오거스틴은 이에 이름이 아이리스냐고 묻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는 오거스틴과 아이리스의 만남을 그렇게 그리는데, 이는 설리와 오거스틴의 마지막 장면과 연결된다. 마침내 통신에 성공하자 오거스틴은 설리에게 지구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말하며, 목성의 위성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오거스틴에게 설리는 감사함을 표시하며, 자신의 이름이 아이리스라고 말한다(영화는 중간에 임신한 여자를 떠나는 오거스틴의 전사를 보여준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아이리스는 오거스틴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환영일 테다. 영화는 분명 저녁을 먹었음에도 그 사실을 잊고 다시 저녁을 먹는 오거스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먼저 어디까지가 오거스틴의 허상인지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텐데, 지구의 아이리스만이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이고 우주를 떠도는 에테르 호의 아이리스는 실재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시 말해 오거스틴이 자신이 버렸던 딸을 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화가 마지막에 다시 목성으로 향하는 설리와 그의 남편을 비출 이유는 없다. 설리는 우주선에서 딸을 갖게 된다. 함께 임무를 수행하던 동료 중 한 명은 죽었고, 나머지는 만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가족을 보기 위해 지구로 돌아간다. 목성으로 돌아가는 에테르 호에 남은 사람은 설리와 남편, 그리고 뱃속의 아기뿐이다. 크레딧이 나오는 순간까지 카메라가 그들을 집요하게 비춤으로써 말한 것은 희망이었다.

평범할 수 있었던 영화가 나쁜 영화가 된 것은 그 지점에서이다. 오거스틴은 임신한 아내를 떠났고, 그 이후에도 딸을 만날 수 있었지만 끝내 외면했다. 그 행동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죽음을 앞에 둔 오거스틴에게 과거의 잘못을 씻어낼 수 있는 면죄부를 발부한다. 그의 죄책감이 아이리스라는 허상으로 현현한다. 그는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오거스틴은 통신을 위해 기지를 옮기는데, 아이리스의 도움을 받아 기지를 찾는 데 성공한다). 그는 딸을 구원했지만, 실제 그 행위로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롭 라이너의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 에드워드(잭 니콜스)는 딸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 평생 딸에게 사과하지 않던 에드워드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야 딸에게 사과한다. 그것에서 폭력성을 느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고 믿는다. 심지어 영화에서 딸의 얼굴은 생략되고, 카메라는 원경에서 아버지의 사과를 받는 딸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딸의 선택을 오로지 사과를 받는 것으로 축소한다. 평생 가슴에 후회를 묻고 살던 아버지의 죄책감이 죽음이라는 이유로 면죄되는 폭력성. 죽음은 과거의 잘못에 면죄부를 발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죽음을 앞둔 이의 통렬한 반성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면죄의 문법이 익숙한 것은 그동안의 영화가 아버지 서사에 큰 비중을 두었다는 방증이다.

과거의 잘못은 반드시 용서받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은 굳이 덧붙이고 싶다. 오늘의 영화가 필요한 것은 회한을 절절하게 늘어놓는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상처를 딛고 꿋꿋이 우주비행사가 된 아이리스의 이야기라는 일종의 제안이다. 딸에게 아버지의 사과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기능하지 않기를, 아버지를 용서한다면 그 선택을 내리기까지 딸의 이야기가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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