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네>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이유에서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글을 쓸 시간은 얼마든 있었다. 어떤 것도 변명밖에는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글을 완성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글이 공유되는 순간부터 무한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것, 글을 쓰며 비대해진 자아를 마주하는 것, 형편없는 글을 돌아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것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운디네>를 보고 곧바로 글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야 글을 쓰는 것은 영화에 대한 기억이 이 순간에도 휘발되고 있음을 느껴서이다. 동시에 고통을 마주하면서도 글을 계속 쓰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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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펫졸드는 세계를 공기 중을 떠도는 부유물로 바라본다. 전작인 <트랜짓>에서는 광장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인물들의 만남과 이별을 다뤘다. 육신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 부유하는 세계의 이미지는 <운디네>로 이어진다. <운디네>에서 펫졸드는 산업 잠수사인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브스키)를 등장시킴으로써 물의 이미지를 영화에 가져오기도 한다. 펫졸드의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며, 하나의 프레임은 다른 프레임으로 범람한다. 혹자는 디지털이 등장한 세계가 어떻게 고정되지 않고 유동할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펫졸드의 세계가 기묘한 것은 고정된 줄 알았던 디지털적인 공간을 유영하는 아날로그적인 공간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펫졸드는 <트랜짓>에서 1940년대의 이야기를 현대의 이야기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영화는 디지털의 응결체인 스마트폰이 등장하지 않는 등 현대성이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운디네>에서도 운디네(폴라 비어)는 스마트폰 이전의 구형 휴대전화를 사용한다.
<운디네>는 운디네와 요하네스의 대화로 시작한다. 운명의 사랑으로 생각했던 요하네스로부터 운디네는 실연당한다. 그들은 운디네가 전화로 요하네스에게 건넨 말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그때 운디네는 휴대전화에 녹음되었기 때문에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며, 자신이 한 말을 굳이 재생한다. 그것은 크리스토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잠수사로 일하던 중 크리스토프는 커다란 메기를 발견한다.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던 크리스토프는 녹화된 화면을 통해 메기를 다시 확인한다. 디지털은 유영하는 세계를 박제했다. 그것은 비단 <운디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트랜짓>에서 게오르그(프란츠 로고브스키)와 마리(폴라 비어)의 첫 만남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마르세유에서 방황하는 게오르그의 모습을 담는다. 그러던 카메라는 갑자기 CCTV 화면으로 전환되더니 마리가 달려와 게오르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장면을 비춘다. 현대는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보다는 디지털로 박제된 소리와 화면이 신뢰받는 세계이다.
디지털은 존재를 증명했다. 운디네가 요하네스에게 “만나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녹음된 이상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크리스토프가 메기를 보았다는 것도, 언젠가 마르세유에서 마리와 게오르그가 만났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펫졸드는 디지털이 등장한 오늘에도 세계는 여전히 유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펫졸드는 유영하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인물을 증발시킨다. 그의 영화에서는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인물과 그 흔적을 쫓는 사람의 메타포가 반복된다. <트랜짓>에서 마리는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운디네>에서 크리스토프와 운디네는 한 번씩 증발한다. 남겨진 사람은 떠난 사람을 찾아야 한다. 디지털은 존재를 증명하지만, 부재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오롯이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트랜짓>에서 마르세유에 도착한 게오르그는 자신이 머물 여관을 찾는다. 모든 외국인은 반드시 등록해야만 하는 규정에 따라 게오르그는 머무를 곳을 찾는 일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받아주는 여관을 방문하는데, 여관주인은 일주일 치의 금액을 먼저 지급할 것을 요구한다. 그때 여관주인은 비자와 승선표를 통해 마르세유를 떠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한다. 승선표가 없는 게오르그는 머무르기 위해서는 머무르지 않을 것을 증명해야 하냐며 허탈해한다. 그 대사가 인상적인 것은 펫졸드의 세계를 압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곳은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곳이다. 크리스토프는 증발한 운디네를 찾아 나선다. 어느 곳에도 그녀가 있었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그녀가 머물던 아파트를 찾아가지만, 단기 임대 아파트인 그곳은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벽에 쏟아진 와인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크리스토프는 부재를 증명하려 운디네를 찾아다니지만, 외려 부재를 증명하는 행위 자체는 운디네가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할 뿐이다.
일반화해 말하자면,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에서 떼낸다. 복제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이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대신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 또한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복제기술이 등장함으로써 원작의 진품성이 훼손되었음을 지적한다. 기술적 복제는 판화와 같이 이전에도 이루어졌던 복제에 비해 더 큰 독자성을 갖고 있으며, 인간의 육안으로는 담을 수 없는 원작의 모습마저도 담아낸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의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는 그럼에도 손을 맞잡는다. 유영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진실은 맞잡은 손의 감촉이라는 것처럼 그들은 포옹하여 서로의 체온을 나눈다. 부유하는 세계에서, 증발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세계에서 부재는 증명되지 않는다. 부재하는 순간에도 맞잡은 체온은 영원히 기억되며, 그것은 다시 존재를 증명한다. <운디네>가 애틋한 것은 모든 것이 박제된 것처럼 느끼는 지금에서 잃어버린 원본성을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