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의 간절함
“Two hundred thousand dollar”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상옥(이혜영)과 정옥(조윤희)이 부동산을 이야기할 때, 그러고 보니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숫자를 들은 기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에 없다는 것일 뿐 얼마든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는 찌질한 남자의 삼류 철학이라고 부르든, 누군가는 홍상수식 인생 찬가라고 부르든, 그는 언제나 희미한 관념의 사이를 부유하거나 관념의 저 끝까지 침잠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영화에서 그동안 모은 돈이 20억은 되지 않냐는 자매의 대화가 흘러나올 때, 또는 2021년 대한민국의 물질을 표상하는 쿠팡 트럭이 전면에 등장했을 때, 홍상수도, 그의 영화에 등장하던 인물들도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영희처럼, <강변호텔>에서의 영환처럼, <도망친 여자>에서의 감희처럼 최근 필모그래피에서 홍상수는 어딘가에서 이탈한 인물들을 그렸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새삼스러움의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언제나 중심에서 주변으로, 물질에서 관념으로, 제도에서 탈-제도로 이탈했다. 그러한 점에서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 역시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여타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이탈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당연하게도 죽음이라는, 그중에서도 시한부라는,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소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20억의 아파트는 무슨 의미이며, 대한민국을 가로지르는 쿠팡은 무슨 의미일 수 있겠는가. 상옥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상옥이 밟은 한국의 지금은 부동산 투자에 대한 열풍으로 사로잡힌 곳이거나 전국을 누비는 쿠팡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물건을 배송해주는 그러한 곳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금 이탈해야만 한다.
상옥과 정옥의 따분하면서도 현실적인 대화가 이어지는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두 가지의 풍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옥은 이 근처에 아파트가 새로 지어지고 있다며 공사 현장을 구경하자고 한다. 상옥은 한창 공사 중인, 뼈대만 있는 건물을 목격한다. 이후 주변을 산책하던 상옥은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오래된 철교 앞에서 나지막한 찬탄을 내뱉는다. 뼈대만 남아있는 건물과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철교. 둘 사이의 대비가 심오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 내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상옥의 기도 때문이다. 상옥은 하늘에 오직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일이 아닌 오늘에 집중하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한다. 나중에는 20억이 될지도 모르는 허름한 건물의 뼈대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철교. 그 사이에서 시간의 무게를 오로지 배제하는 것은 가능할지 나는 모르겠다.
정옥과의 만남을 담은 전반부와 재원(권해효)과의 만남을 담은 후반부를 잇는 것은 이태원에서의 씬이다. 상옥은 약속을 미루자는 재원의 연락을 듣고 과거 자신이 살았던 이태원으로 향한다. 옛집 주인(김새벽)과 이야기를 나누고, 한참을 자신이 살았던 집을 살피던 상옥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다며, 다시 한번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올린다. 과거에서, 기억에서 벗어나 오롯이 얼굴 앞에 있는 천국을 보겠다는 간절함. 어쩌면 영화가 이탈하려 했던 건 단지 ‘이곳’이라는 공간을 초월한 선형적인 시간, 유동하는 기억, 불확정한 미래를 포괄하는 무엇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재원과 만나는 카페는 상옥이 ‘지금’ ‘이곳’에서 이탈하여 가닿기를 원했던 그러한 장소로서 기능할 것이다. 얼굴 앞에 천국이 있다는 내밀한 고백을 내던질 수도, 서툴지만 정성스레 기타를 연주할 수도, 성적인 긴장감에 휩싸여서 은근한 추파를 던질 수도 있는 공간. 카메라는 비가 내리자 하나의 우산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 재원과 상옥을,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낸다.
재원은 상옥과의 약속을 저버린다. 어쩌면 카페의 이름처럼 재원과 상옥의 만남은 한낱 소설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죽음이라는 분명히 실재하는 현상 앞에서 끊임없이 현실에서, 물질에서, 기억에서, 시간에서 이탈하려 했던 상옥의 간절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