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 아이다

컷과 컷을 유동하는 아이다

by 박현신

<쿠오바디스, 아이다>가 보여주는 건 총에 맞은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그사이를 아무것도 알 리가 없는 개가 뛰어다니는 그런 광경이다. 아스밀라 즈바니치는 보스니아 내전의 참혹한 광경을 담아내면서 어떤 감정적 고조도 유도하지 않는다. 영화는 아이다가 겪어야 했던 상황을 따라가려 할 뿐이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그러한 참혹함에 고개를 떨어뜨리다가도, <쿠오바디스, 아이다>가 어떠한 단절과 어떻게든 그것을 이어보려는 안타까운 발버둥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왼쪽으로 트래킹하며 니하드와 함디아, 세요를 담아낸다. 세 남자를 차례로 담아낸 카메라는 아이다의 얼굴을 줌 인하는 컷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네 명의 가족을 한 번에 담아내는 컷을 마주함과 동시에 아이다가 가장 오른쪽 자리에 앉아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연히 카메라가 세 남자와 아이다를 분리해야만 했는가는 물음이 뒤따른다. 카메라는 아이다에서 시작하는 하나의 컷에 네 사람을 담을 수도 있었지만, 구태여 그것을 구분했다.​



물론 하나의 가족을 둘로 나누는, 영화의 첫 번째 단절이 발생하는 기준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잠재적 군인으로 추정된 남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보스니아 내전의 희생자와 생존자. 떠나간 사람과 남겨진 사람. 내부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자와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왕복할 수 있는 자. 인지해야 할 것은 그러한 기준은 이미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린, 불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보스니아 내전의 과정을 차례로 밟아가는 영화가 아닌,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인지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시작에서부터 영화는 희생자와 사망자를 알고 있었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를 관람하는 내내 느꼈던 참담함은 첫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의 두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UN군의 통역사로 일하는 아이다를 만나게 된다. 영화의 두 번째 장면. UN군의 회의 장면을 영화는 각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법으로 담아낸다. 카메라는 멀리서 테이블에 앉은 인물들을 단번에 잡아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서로 다른 언어로 발화하는 인물의 얼굴을 잡는다. 이 장면은 아이다가 마주할 수많은 상황들을 암시한다. 아이다는 단절된 언어를 이어 붙이는 사람이다. 영화 내내 단절된 것을 이으려 할 것이다.


아이다는 언어와 언어를 연결하는, 안전 기지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동시에 아이다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커트 사이를 유동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아이다가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은 역사라는 무게에 짓눌린 불변하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다는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희생이 예정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개인을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드는 집단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넓은 안전 기지를 쉼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영화는 그런 아이다의 뒷모습을 성실하게 따라간다. 마치 카메라조차도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채 아이다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것처럼.


니하드와 함디드, 세요를 포함한 수많은 남성들이 참혹한 결말을 맞는 장면과 가족들의 유골을 발견한 아이다가 오열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영화는 그들이 마주쳤을 감정을 감히 상상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희생의 순간을 담아내지 않고 나무를 오래 비추는 카메라. 오열하는 아이다의 얼굴을 잡지 않고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는 카메라. 영화는 때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많은 것을 말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미나리